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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백제가 재기를 꿈꾼 땅 공주 공산성

 

   
 공산성의 서문(금서루)

   
 서문에 오르는 길목에는 지방 관찰사와 감사등의 공덕비가 즐비하다.

   
 공산성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문화답사객들.

   
 인조가 피신했던 곳인 쌍수정 아래 비각에서 설명을 듣는 답사객들

   
 공산성의 남문(진남루)

   
 호젓한 성내 길을 걷는 노부부

   
 건물지 앞에서 설명을 듣는 문화답사객들

   
 성문 앞에서 다시 한 번 힘차게 뛰어보자는 다짐을 해본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사적 12호인 공주 공산성은 백제가 한성 위례성을 버리고 금강을 북으로 두고 고구려의 침략을 막을 계획으로 공주로 천도하여 이곳 공산성을 근거로 다시 재기를 꿈꾸었다고 하는 역사의 땅이다..성의 남쪽에는 진남루를 두고 북쪽에는 공북루, 동으로는 영동루와 서로는 금서루를 두었으며, 암문도 있었다. 백제시대 당시에는 웅진성(곰나루성)으로 부르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 공산성(곰나루 산성)으로 불렸으며, 조선 인조 때에는 쌍수산성으로 고쳐불렀다고 한다.

백제시대 축조 당시에는 토성으로 되어있던 것을 조선조 광해군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가 공신으로써 제대로 된 대접을 해주지 않자 난을 일으킨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왔다가 간 뒤에 석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공산성은 낮은 구릉지에 낀 협소한 산성으로 이곳에 백제의 왕도와 궁궐내 많은 건축물들이  있었다는데, 너무도 협소하여 과연 궁궐이 있었을까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다.

이곳에 왕도를 둔 시절 성왕은 538년 일본에 학자들을 보내서 학문을 전수시켜주었고, 훌륭한 스님들을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건네주여 불교도 전수하였으며, 건축관련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일본에 최초로 기와집(사찰건축물로 비조사(飛鳥寺)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이곳 공주에는 당시의 건물은 말할 것도 없고 제대로 된 주춧돌 하나도 남아있지를 않으니, 패망한 왕조의 자취는 이리도 쓸쓸한 것인가 하는 상념에 들어  본다.

후당서(後唐書)의 기록에 보면 백제가 멸망하던 날을 장군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나왔다고 한다. 660년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자 의자왕은 부여성을 버리고 공산성으로 근거를 옮겼는데, 이곳에서 각 지역의 백제군사들이 공주로 집결하여 나당연합군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임금을 지켜야할 장군 '예식'은 의자왕을 생포하여 당나라 장군에게 항복하고 그를 인도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장군 '예식'은 당나라 장안에서 자신의 조국인 백제와 그가 모시던 임금을 팔아먹은 보상으로 당나라의 대장군칭호를 하사받고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다고 그(예식)의 묘비명에 기록되었다. 이후 공산성은 왕도로서의 명을 다하고, 1965년 사적지로 지정된 이후부터 근년에 이르러 이만큼 복원하여 옛날 역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