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시비를 겪고 나서 몸은 지쳤고 是非閱來身倦
영욕을 버린 뒤라 마음은 비었다. 榮辱遣後心空
사람 없는 맑은 밤 문 닫고 누우니 閉戶無人淸夜
들려오는 저 시냇가 솔바람 소리. 臥聽溪上松風
▲ 솔바람 소리로 마음을 비울까?(그림 운곡 강장원 한국화가)
위는 조선 후기의 시인 홍세태(洪世泰, 1653~1725)의 한시 “우음(偶吟, 그냥 한번 읊어보다)”입니다. 홍세태는 아버지가 무관이었지만, 어머니 강릉 유씨가 종이었기 때문에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그도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똑똑한 홍세태를 본 사람들이 돈을 모아 속량(贖良, 몸값을 받고 노비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이 되게 하는 일)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홍세태는 5살에 책을 읽을 줄 알았고, 7~8살에는 이미 글을 지었는데 속량만 되었지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보고 벼슬에 나갈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어릴 때 이미 자신의 처지를 알았던 홍세태는 중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시로 이름을 떨치려 마음 먹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문인 김창협과 김창흡, 이규명 같은 사대부들과 절친하게 지내는 것은 물론 많은 중인들과도 교류했지요. 홍세태는 역과에 급제한 뒤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가서 크게 이름을 떨쳤습니다. 일본인들은 그의 시와 글씨를 얻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다녔고, 그의 초상화를 가보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지요.
홍세태가 지은 <염곡칠가(鹽谷七歌)>에 있는 한시를 보면 당시 백성들의 비천한 삶을 가슴 아파하는 내용도 보입니다. 그는 재물을 모으는 데 관심이 없었고, 평생을 가난 속에서 시를 지으면서 살았습니다. 자식은 8남 2녀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에 불행한 일생을 보냈지요. 그러나 홍세태는 《해동유주(海東遺珠)》라는 위항 시선집을 펴내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 서얼 출신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학) 발달에 구심점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살다보면 영욕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기가 쉽지 않은데 그런 점에서 홍세태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