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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죽헌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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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선생을 모신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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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에 모셔진 율곡선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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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죽헌(오른쪽 방문 위에는 율곡이 태어난 몽룡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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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죽헌의 현판( 검은 대나무가 있는 주변에 있는 집) 집 주면에 오죽들이 많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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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선생이 살았다는 외가(신사임당의 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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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각(임금님이 하사한 벼루가 있다. 벼루의 뒷면에는 정조임금이 율곡의 친필인 격몽요결과 어릴 때 쓰던 벼루와 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를 가져오게 하여 직접 본 뒤에 벼루 뒷면에 율곡선생을 찬양하는 글을 새기게 하고 격몽요결의 책에는 머릿글을 지어서 잘 보관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여 작은 전각을 지어 현재 그 책과 벼루를 보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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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각에 진열된 율곡선생이 쓰던 벼루와 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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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선생 동상 |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강릉 오죽헌(烏竹軒=검은 대나무가 있는 집)은 조선조 성리학의 양대 산맥 중 서인들이 종조로 추앙하는 율곡선생의 외갓집이 있던 곳이다. 본가가 아닌 외가에서 태어나는 것이 당시에는 너무도 흔한 일이었고, 이는 장가들면 한동안 처가살이하던 옛 풍속의 연장이다.
율곡은 외갓집인 이곳 강릉 오죽헌(몽룡실)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어린 시절 한동안 이곳에서 보내다 6세가 되던 해에 본가인 한양으로 돌아왔다. 때문에 본가보다는 외갓집이 더욱 정들고 그리웠을 것이다. 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자신이 살아오던 정든 강릉땅을 떠나서 시댁 한양본가로 오면서 높고 험한 대관령을 넘기전 대관령의 중턱에서 가쁜 숨을 잠시 쉬어갔는데 대관령 고개의 절반을 넘었다고 해서 반정리라고 이름 지었고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 성리학이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 가운데 한분인 율곡이 태어난 고향땅인 강릉 오죽헌은 자신의 본가보다도 더 율곡의 유적이 많다. 언뜻 보면 이곳이 본가였던 것으로 착각하기 쉬울 정도다.
아쉬운 것은 퇴계와 율곡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후대 유생들은 퇴계의 학문을 추앙하고 따른다는 동인과 율곡의 학문을 따른다는 서인으로 분파 되어 당쟁을 일삼은 점으로 이 두분이 다시 살아나신다면 통탄할 듯 하다.
그런데 퇴계선생이 70을 넘기면서까지 장수한 반면, 율곡선생은 50세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동서로 파가 나뉘어 당쟁이 시작되던 선조 때 율곡은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율곡선생은 학문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지략이 있었으나 몸이 쇠약하여 관직을 여러차례 사양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그의 탁월한 경륜을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사직한 뒤에도 자주 불러서 관직을 맡겼다.
당시에는 영의정을 하다가도 상대당의 상소에 파직과 귀양도 흔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율곡을 모함할 수 없을 정도로 정사를 잘보았다고 하니, 이런 율곡같은 훌륭한 관료이면서도 학자가 이 시대에도 꼭 필요할 때다. 마음을 크게 쓰고 자신의 행동이 올바른 율곡같은 인재는 그 때나 이때나 귀하기 그지 없기에 그리도 그리운가 보다.
요즈음 국무총리 장관 후보들의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율곡의 탄생지 강릉오죽헌을 돌아보니, 마음이 더욱 착잡하다. 어디 율곡같은 인품있는 사람은 없는 것인가??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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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