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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산대첩비 전경, 왜구와 치열한 전투의 흔적을 기록했던 대첩비의 훼손된 원본과 다시 세운 황산대첩비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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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손되어 땅 속에 묻혔던 비석을 다시 캐내어서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역사의 흔적은 잘 지워지지 않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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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서진 대첩비 원본의 보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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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로 세운 대첩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그 안에 세로 세운 대첩비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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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세운 대첩비각 현판과 대첩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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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세운 대첩비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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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첩비를 보러온 답사객들, 국립민속박물관 문화답사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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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로 쓰여진 대첩비를 한글로 다시 세운 번역본 황산대첩비 |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나라이면서 멀 수밖에 없는 나라인가 보다. 한국과 일본, 그 인연은 참으로 기구하다. 고대 한국이 일본열도에 수많은 사람과 문물을 전한 것은 일본의 사서들이 앞다투어 기록하는 바와 같다. 그러나 그러한 은혜는 침략과, 침탈이라는 형식으로 고대 한국을 괴롭혀 왔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역사적 상처는 첫째가 고려말 왜구들의 침탈이었고; 둘째는 조선시대 중기에 발생한 임진왜란이었으며, 셋째로는 나라를 통째로 빼앗겼던 일제강점기이다. 벌써 70년이 지난 일제강점기이지만, 지금도 우리는 그 일제강점기의 상처를 다 치유하지 못하고, 곳곳에 상처가 남아있다.
상처도 상처지만 무엇보다 큰 상처는 "일본의 식민사실을 부정하고 오히려 조선을 잘 살게 해주기 위한 것이라는 망발과 함께 위안부 문제와 같은 인권의 문제조차도 눈을 감고 있는 태도"에 한국인들은 마음에 쌓인 응어리를 풀지 못하고 있다. 나라는 가깝지만 마음은 더욱 더 멀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일본에게 입은 3번의 큰 상처 중에 가장 먼저 있었던 것은 고려말 왜구의 집단적 침탈과 그 침탈에 대항하던 고려말 토벌대 간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역사 유적이다. 그것은 남원에 있는 이성계장군의 치적을 기록한 '황산대첩비'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 비석 또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었으니, 이 또한 상처중에 상처라 아니할 수 없다.
고려말 우왕 때 1378년 왜구 대장 아기발도는 500여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금강으로 침입하여 한반도의 남부지방을 유린하며 식량과 문화재를 약탈하였다. 이때 고려에서는 최무선장군이 화약을 이용한 함포를 제작하여, 금강에 정박해있던 왜선 500척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그러자 왜구들은 바다로 도망가지 못하고 내륙으로 도망쳐 고려군과 전투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때 이성계가 왜구소탕의 대장군으로 고려의 정예병을 이끌고 이곳 남원땅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왜구는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약탈을 일삼는 해적들로 큰 골치거리였고, 그 기세 또한 대단하였다. 왜구의 대장인 젊은 아기발도는 뛰어난 용맹으로 유명한 장수였기에 그들의 기세는 자기들의 배가 없어 퇴로가 막혔다지만 쉽게 꺾이지를 않았다. 이 때 최고의 명궁이었던 이성계장군은 그의 부장인 '이두란'과 합작으로 왜구의 대장인 '아기발도'를 단 두발의 화살로 사살 하였는데, 그 명궁의 이야기는 참으로 전설같은 것이다.
전설을 잠깐 보면, 왜구와 고려군이 서로 대치하면서 멀리 마주하고 있을 때였다. 온몸에 철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를 쓴 '이기발도'를 잡을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아무리 명궁이라 한들 갑옷과 투구를 뒤집어 쓴 장수여서 화살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계는 부장인 이두란과 작전을 세웠다. '먼저 이성계가 아기발도의 투구를 맞춰 투구를 떨어트릴 것이니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이두란에게 바로 화살을 쏘아 아기발도의 머리를 쏘라'는 것이었다.
전무 후무한 두사람의 화살 작전은 맞아 떨어져 왜구의 장수 '아기발도'가 이성계의 화살에 투구가 벗겨지자, 곧바로 쏜 이두란의 화살이 아기발도의 머리를 뚫어버린 것이다. 이성계와 이두란이 쏜 단 2발의 화살로 왜장을 처치하자, 믿었던 장수를 잃은 왜구는 기세가 꺾여 완전히 궤멸될 수밖에 없었고, 고려군은 대승을 거두어 왜구를 완전 소탕하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선조는 이런 이성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 남원땅에 '황산대첩비'를 세우고, 그의 공적을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이런 역사는 한국인에게는 후손들에게 남겨줄만한 교훈이고, 자랑거리이지만, 일본인들게는 자기 조상들이 당한 치욕의 역사이기에 지우고 싶은 역사인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에 ' 황산대첩비' 원본을 깨부수고 거기에 쓴 글자를 모두 정으로 쪼아 망가트려 땅속에 파묻었던 것이다.
그런 비극적인 사실은 한국이 일제에게서 해방된 뒤, 다시 땅속에서 깨어진 채 묻혔던 비석조각들을 끄집어 내어 흉하게 부서진 조각들을 얼기 설기 맞추어 그대로 볼 수 있도록 비각을 세워서 보존하였고, 본래의 비문의 내용은 다시 새겨 세웠으며, 또 하나의 비석에는 그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세웠다.
그래서 남원의 황산대첩비는 3기의 비석들이 세워져 있으며,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의 증인으로 서있는 것이다. 남원을 지나는 이들이여! 남원고을에는 이도령과 성춘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기구하고 아픈 우리민족의 상처도 있으니 광한루만 들러보고 오지 말고 이곳도 잊지말고 꼭 다녀오기를 ...
*위 치: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 344-2
* 문화재명: 국가사적 104호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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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