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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복사지 전경 주변은 민가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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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역사로 사찰 입구의 수호신이다. 보통 2기가 있어야 하는데 1기만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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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역사의 모습이 매우 역동적인 무술시범 자세이고 얼굴은 이국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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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 입구에서 절의 성격을 나타내는 상징기를 달았던 당간지주다. 당간지주 사이에 깃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절의 상징기나 행사를 알리는 기를 달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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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5층석탑으로 이 시대 탑의 특징은 통일신라의 균형미를 잃고 탑 층수도 3층에서 5층으로 늘었다. 탑신의 하단부에는 목조건물의 난간처럼 돌출한 장식이 있어 이채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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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신부는 다 없어지고 옥개석만 몇 층 남은 석탑유구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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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서진 석탑과 석불이 모셔진 전각. 전각은 본래 모습이라기 보다는 최소한의 보호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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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강석 연화대좌 위에는 불상이 안치 되었을 터인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거의 어른키에 이를만큼 연화대좌가 큰 것으로 미루어 불상 크기 또한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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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간지주와 건물터, 석등의 좌대가 일직선을 이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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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교한 석등의 좌대받침으로 복련을 정교하게 새겼다. 가운데 구멍은 석등의 하부가 놓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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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물의 아랫부분에 기둥과 인방을 받치는 석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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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물이 있던 건물터. 기둥이 있던 초석들이다. 기둥간격이 조밀한 것으로 보아 목탑터로 추정된다. |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만복사 저포기》는 조선시대 쓴 최초의 본격적인 전기소설이다. 이는 당시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시습이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쫓아내고 임금이 된 것을 보고, 은둔하면서 저술한 것이다. 그는 현실의 삶보다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인생의 무상함을 얘기하고, 현재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그 시대 정권에 견줘 비판적으로 썼는데 이야기는 재미도 가미되어 어렵지 않다.
김시습은 《만복사 저포기》를 비롯해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전기》,《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등 5편의 이야기를 한데 묶어서 《금오신화》란 책으로 엮어내었는데 여기서 금오란 작가가 금오산 거처에서 쓴 이야기라는 뜻이다.
만복사는 신라말 고려초에 세워진 남원읍내의 평지가람으로 당시에는 스님들이 부처님 당시의 생활을 그대로 이어받아 탁발생활을 하였는데 만복사 스님들 수백명이 아침 저녁으로 시주를 나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고 전한다.
만복사는 남원 8경에도 속할 만큼 그 경내가 크고 아름다웠다고 하나 조선조가 들어선 이후 차츰 불교의 사세가 약해지다가, 임진, 정유재란을 당하여 절이 왜군과 대항하는 본거지가 되고있다고 해서 왜군이 모든 전각에 불을 질렀다.
그런 까닭으로 수백명의 스님들이 기거하고 수행하던 만복사는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고, 그나마 돌로 만들어진 불상, 당간지주, 석련대, 석탑, 그리고 기둥의 초석들만이 건물의 잔해에 덮인채 땅속에 잠들고 말았다. 그렇게 만복사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갔다.
그러다가 만복사는 1979년부터 1985년까지 6년여에 걸친 문화재발굴조사 때 다행히 땅속에 묻혔던, 유구와 불상 석인, 석탑, 당간지주들이 본래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석불은 하나의 화강석 바위에 불상과 광배를 함께 새긴 것이었으나 조선조 남아선호사상의 탓에 불상의 코를 갈아먹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잘못된 신앙으로 부처의 코가 없어진 것이 참으로 아쉽다. 석탑은 신라시대의 정형에서 벗어나 다소 변형된 형태의 5층탑으로 높이 서있어 그나마 다행스럽다.
만복사의 또 한 석탑은 탑신과 기단부 등 석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깨어진 옥개석만이 3개 남아 포개어진 모습으로 조립되었고, 그리고 부처님을 모셨던 거대한 석련대(돌로 만든 좌대)와 사찰의 문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던 석인(금강역사)이 하나만이 절 입구쪽에 우뚝 서있다.
석인의 모습은 눈을 부라린 모습이 험상궂은데다가 적을 제압하기 위하여 손을 움추린 모습이 강력한 힘을 느끼게 한다. 금강역사나 사천왕의 인상을 험상굿게 만든 이유는 신성한 공간인 절로 들어오는 잡귀들의 범접을 금하는다는 뜻으로 일부러 그렇게 만듯 것이다.
만복사에 남아있는 또 하나의 석물인 당간지주는 직사각형으로 잘 다듬어진 보편적인 형식으로 고려시대의 큰 사찰에는 대부분 이러한 형식의 당간지주가 있었다.
당간지주는 2개의 기둥사이에 당(깃발)을 걸 수 있도록 당간을 설치하기 위한 지주석인데, 당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부분 당간지주만이 남아있다. 당간의 맨 꼭대기에는 용머리 장식으로 마무리를 한 경우가 많다. 당간은 여러가지 재료로 만들어졌는데 철당간 석당간 목당간 등이 있다. 만복사의 당간은 과연 무슨 재료로 만들어진 것인지 궁금하다.
이들은 오늘날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예전 만복사의 화려한 시대를 어렴풋이나마 되새겨 주고 있다.
위치: 전북 남원시 왕점동 기린산 기슭에 있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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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