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정석현 기자] 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관장 한은희)은 오는 9월 14일까지 기획전 “서울의 푸줏간”을 열고 있다. 서울시 최초로 가축시장․도축장․축산물시장이 한 곳에 설치된 마장동, 백정들이 하는 미천한 일이라며 노출을 꺼려했던 마장축산물시장의 사람들이 직접 생생한 삶의 현장을 공개한다. 서울 시민의 영양분 공급소로서 마장동의 지나간 삶의 흔적과 기억을 되짚어 보는 전시이다.
전시는 오랜 시간 도심 부적격시설로 지목되면서도 수도권 육류의 70%를 공급하며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장축산물시장이 언제부터, 왜 하필 마장동에 반세기 넘게 자리하고 있는지, 시장의 영역이 끊임없이 확장되는지, 그 원동력에 대한 세밀한 추적이다.
‘살곶이목장[箭串場]’과 간송 전형필의 땅에 농사짓던 ‘마장동 김씨네’
▲ <살곶이 목장지도(箭串牧場地圖)>, 1789~1802(왼쪽) / <한양전도(漢陽全圖)>, 1780년대
▲ 마장동 토박이 김씨네 일가 사진, 1950년대(왼쪽) / 간송 전형필에게 소작료 지급한 영수증, 1950
마장동(馬場洞)은 조선시대 왕실 및 관청의 말을 기르던 살곶이목장[箭串場]의 수말을 기르던 지역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살곶이목장은 말의 사육과 궁중의 목장, 왕의 가마 등을 관장하던 사복시(司僕寺) 소속의 양을 기르는 곳[養馬場]이다. 왕이 말을 지켜보았던 ‘화양정(華陽亭)’, 말먹이를 키우던 ‘장안평(長安坪)’, 암말을 기르던 ‘자양동(紫陽洞)’과 함께 마장동과 그 주변 지역은 살곶이목장과 관련된 지명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마장축산물시장이 들어서기 전 마장동은 미나리․무․배추밭이 즐비한 농촌마을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우리나라의 대표 문화재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의 땅에 농사를 지었던 마장동 토박이 ‘김영진씨 일가’의 80여 년간의 생활상을 소개한다.
마장동은 예부터 한양도성 안에 푸성귀를 공급하는 지역으로 1930년대 마장동에 정착한 김영진 씨 일가는 왕십리․마장동 등지에 대규모 농사를 지었는데, 특히 이번 전시에서 간송 전형필의 땅에 어마어마한 양의 농사를 짓고 소작료를 지급했던 영수증이 최초로 공개된다. 또한, 마장동 김 씨네 2세대 김용록이 중일전쟁(1937~1945)에 참전하고 그 대가로 받은 채권이 한일협정(1960)으로 휴지화되고, 지병을 얻어 목숨마저 잃어버린 비운의 사연을 통해 마장동 사람들의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역사를 되짚어보기도 한다.
마장동에 왜 도축장이 들어섰고, 축산물시장은 떠나지 않을까?
▲ <소 보험증(牛保險證)>, 1897(왼쪽) / <마장동 가축시장>, 1962
▲ <마장축산물시장>, 1970년대(왼쪽) / <계량법 홍보물>, 1964
소의 도살을 금했으나 쇠고기에 대한 수요가 많아 밀도살이 횡행했던 500여 년의 서울 역사에 현대식 도축장이 들어선 것은 1909년이다. 50여 년 동안 여러 곳에서 시행착오를 거쳐, 광복 이후 최초로 마장동에 가축시장․도축장이 세워진 연유를 밝힌다. 대한제국기인 1909년, 신설리와 합동에 한반도 최초의 도축장이 건립 되었고, 아현동 도축장(합동 도축장이 이전)과 경성부 내 사설 도축장을 통합해 현저동 도축장(1917)을 지었으나, 또다시 숭인동 도축장(1922)이 신설되는 등 현대식 도축장의 입지는 해결이 어려운 숙제였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도축 폐수의 처리가 용이하고 도심으로 원활 하게 육류를 공급할 수 있는 교통이 편리한 마장동이 최적합지로 지목되어, 숭인동의 가축시장․도축장의 이전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광복 이후 서울시가 그 계획을 받아들여 가축시장(1958)․도축장(1961)을 마장동에 설립했고, 시민들에 의해 축산물시장이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장동은 변화무쌍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가축시장1958~1974․도축장1961~1998이 마장동에서 사라졌지만, 마장축산물시장 상인들은 지방에서 도축된 소․돼지의 값싼 운임과 원활한 물량 수급을 위해 마장동을 떠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는 소비자의 소매가와 안전한 먹거리를 위해서 마장축산물시장의 역할과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점들을 제시하고 있다.
‘쇠고기․돼지고기’를 만드는 발골사(發骨士)․정형사(定型士)들의 학습장
▲ <마장동 한우 발골 작업(왼쪽)> / <마장동 한돈 발골 작업>
소․돼지를 분해하여 ‘쇠고기․돼지고기’를 만들기 위해서 마장축산물시장에 모인 발골․정형사들은 10년에 가까운 교육 기간을 가진다. 그 동안 노출을 꺼려했던 마장축산물시장 사람들이 대형마트․정육점에 도매로 판매하기 위해 대대로 전승되던 소․돼지의 대분할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20세기 초, 미국의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는 우리 선조들을 ‘쇠고기 맛을 세분해 내는 고도의 미각문화를 지닌 민족’이라 칭했다. 소 1마리를 10개 부위로 대분할하고 39개의 부분육으로 나눈 뒤 100여 가지의 판매부위로 나누고, 돼지 1마리를 7개의 큰 부위로 대분할해 22개의 부분육으로 소분할하는 과정은 가히 ‘신의 손놀림’의 경지이다. 체형․체급이 각기 다른 소․돼지를 마장축산물시장 발골․정형사들이 정확한 부위로 나누는 작업과정을 영상으로 최초로 공개하고, 작업장을 실감나게 재현함으로써 관람객들의 흥미와 궁금증을 풀어줄 예정이다.
한양양반, 경성인, 서울 서민의 고기밥상
▲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 1942(왼쪽) / <경성 정자옥(丁子屋) 개점기념 신선로>, 1933
▲ <대중옥(연출-왼쪽)> / <나무냉장고(木冷藏庫)>, 1950년대
우리는 특별한 날이면 ‘쇠고기․돼지고기’를 굽고, 데치고, 무쳐 한상 거하게 차려내는 밥상문화를 가지고 있다. 서울 사람들의 밥상 위에 ‘고기’가 주연이 되고, ‘일두백미(一頭百味)’라 하여 소 1마리에서 나오는 100가지 맛’을 남녀노소가 알기까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그리고 현대의 대표적 고기 밥상을 조명하였다. 농업을 나라의 뿌리로 여긴 조선시대에 소의 도살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300년 전, 한양의 양반들은 음력 시월 초하루에 야외에서 쇠고기를 구워 먹는 모임인 ‘난로회(煖爐會)’를 가졌다.
도축장과 시장 곳곳에 정육점이 들어선 일제강점기의 경성인들은 소․돼지의 살코기와 부산물을 이용해 고급요리점에서 ‘신선로(神仙爐)’를, 서민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문화를 탄생시킨 ‘설렁탕’을 즐겼다. 뿐만 아니라 1960년대, 경제 개발의 최전선에서 힘들게 노동하던 사람들의 지친 배를 채워주며 위안을 주던 왕십리의 유명한 해장국집인 ‘대중옥’을 재현하여 어려웠던 시기 서민들의 를 자극하고자 한다.
하 빼고는 버릴 것 없는 축산물
우리 선조들은 소․돼지․말을 도축하면 그 뼈와 뿔, 털과 가죽을 까닭 없이 버리는 일이 없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동안 무심코 지나쳐 버린 축산물로 만든 여러 가지 공예품과 생활용품을 확인할 수 있다. 가축을 도축해 살코기와 부산물을 제거하고 남은 부위들은 다양한 생활용품으로 재탄생되었다. 소의 뼈는 때로는 길흉을 점(占)치는 도구로 새로운 역할을 하였고, 때로는 활시위를 당길 때 건장한 사내들의 손가락을 보호하는 깍지가 되기도 하였으며, 소의 뿔은 화각공예품으로 다시 태어나 최고의 공예품이 되었다.
말과 돼지의 털은 모자로 재탄생하고 동물의 가죽은 옷에서 신발, 가방 까지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이 밖에도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그저 먹고 즐기는 것뿐이 아닌 다채로운 축산물의 쓰임새를 직접 살펴볼 수 있다.
▲ <소 끌고 가는 남자들>, 1960년대(왼쪽) / <소와 사람들>, 196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