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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교 건너기 전 석장승, 본래는 2기가 있었는데 하나는 1930년대 홍수로 떠내려 갔다고 한다. 석장승 뒤로 흐르는 냇가 어딘가에 묻혀있지 않나 궁금하다. 이 석장승 이름은 '용호금사 축귀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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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상사로 들어가는 다리 위에서 본 만수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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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교 건너편 오른쪽에 있는 석장승, 그 이름은 대장군으로 새겨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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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교를 건너면 왼쪽에 있는 석장승. 가장 크고 듬직하다. 그 이름은 상원주장군으로 새겨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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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교를 건너기 전 석장승 확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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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교 건너서 오른쪽에 있는 석장승 확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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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교 건너 왼쪽에 있는 석장승 확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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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세운 목장승들 |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실상사는 통일신라 9산선문의 하나로 실상선문을 연 홍척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지리산을 주변으로한 대찰로 알려져있다. 홍척국사는 당시 보림사를 개창한 도의국사와 함께 당에 유학하여 선종의 법을 전수하고 돌아왔는데 도의는 장흥에 보림사를 홍척은 남원에 실상사를 지었다.
이후 그의 수제자인 수철화상이 실상사를 크게 중창하여 선문의 일가를 이루었고, 그뒤 선종의 대찰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고려를 거치고 조선조에 이르러 세조때 큰 화재가 발생하여 사내 전 전각을 불태우고 200여년을 석탑과 석등 석비 승탑 등만 남기고 폐허로 남았다.
그러던 중 1684년 숙종 때 벽암대사가 다시 중창불사를 주도하여 1700년 대에는 38개의 전각이 들어서는 대가람으로 다시 서게 되었다. 그러나 1882년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1884년 월송스님이 전각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실상사는 발굴조사결과 지하에 묻혀있는 전각의 초석과 기잔들이 나타났으나, 그 원형복원은 언제쯤 이루어질지 알 수 없다.
실상사는 남한의 큰 산인 지리산을 의지하고 있어 실질적으로는 산 속에 있으면서도 사찰의 입지는 상당한 평지에 세워져있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절의 입구근처에서 폭 100m가 넘는 냇가를 이루고 흐르는데, 지금은 철근콘크리트 다리지만 예전에 섶다리가 놓여있었을 것이다. 섶다리는 홍수로 냇물이 넘치면 떠내려가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스님들은 다리공사를 새로 했을 것이다.
신도들은 다리를 건너기 전 장승에게 무사히 건너기를 기원하였을 것이고, 절에서 나올 때에도 또 무사히 건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였을 것이다. 다리의 전후에 놓여있는 장승은 절에 드나드는 신도들의 친구요 , 수호신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실상사의 장승은 본래 4기가 있어 건너기 전에 2기 절쪽에 2기가 각각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특이하여 인상적이다. 전체적인 모습은 머리에 관모를 쓰고 왕방울 눈에 코도 큼직한 것이 돌하루방이나 서역 사람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친근감이 든다.
만수천을 건너기 전에 있는 석장승은 이름이 '용호금사축귀장군'이고, 실상사 쪽에는 각각 '상원주장군'과 '대장군'이다. 근래에는 목장승을 3기 세웠는데, 그 모습도 매우 특이하고 무서우면서도 멋스럽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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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