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2백여 년이 지난 뒤에 송언신을 아뢰는 자가 있기에 어첩(200년 전 선조임금이 내린 어찰)을 가져와 읽어 보니 마치 운한(雲漢)이 밝은 빛을 내며 회전해서 찬란하게 문장을 이루어 상서로운 빛이 나와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다. (가운데 줄임) 듣건대 그의 집이 예부터 한강 남쪽에 있는데 매우 가난하여 어첩을 정성들여 걸어둘 곳이 없다 하므로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집을 지어주어 봉안(奉安)하게 하였고, 그에게 영양(榮襄)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이어 그 자손을 찾아서 그 고을에서 먹여주도록 하였다.” 이는 정조실록 27권 13년(1789)) 6월 5일 기록입니다.
▲ 보물 제941-2호 송언신(宋言愼) 초상
송언신은 선조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예문관검열과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등을 지낸 인물로 언관으로서 서인을 공격하는 데에 앞장서는 바람에 여러 번 삭탈관직당하는 등 파란만장한 정치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나 선조는 그를 몹시 신임하여 ‘파직’하라는 상소문도 여러 번 반려하는 등 ‘송언신’을 적극 두둔하였고 직접 어찰을 내리는 등 각별한 사랑을 쏟습니다. 한번은 함경감사 시절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사직을 요청하지만 선조임금은 “이와 같이 사직을 청하니 소원을 들어 주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함경도에는 머지않아 적의 공습이 예상되니 조석으로 염려가 된다. 이런 때 방백을 바꿀 수 없으니 경은 우선 참고 직무를 살피라.”(선조실록 109권,1599년 2월 25일)고 할 정도로 송언신을 신임합니다.
그 송언신의 초상이 보물 제941-2호로 경기도 박물관에 남아 있어 눈에 띕니다. 송언신 영정은 오사모에 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으로 가슴에는 모란과 운안(雲雁, 구름과 기러기) 무늬가 있는 흉배가 달려있으며 삽금대(조선 시대 정2품의 벼슬아치가 관복에 띠던 띠)를 두르고 있어 정이품의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지낸 송언신의 당시 품계를 잘 나타내줍니다. 단령의 외곽선은 부드럽게 처리한 데 견주어 손을 잡은 부위의 주름이나 윤곽은 각지게 처리되어 있고, 옷 주름은 간단히 균일한 선으로 처리하는 등 매우 정교한 그림입니다. 이 영정은 송언신이 죽기 1년 전인 1611년 작품이어서 무려 403년 전 것으로 오늘 우리에게 당시 문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