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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청나라)과 일본조차지의 경계 계단에는 두 나라의 상징이 석등으로 표현되었다. 현재 공사 중.(왼쪽이 청나라, 오른쪽이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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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지의 중심이던 관청건물 현재는 인천 중구청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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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건축물 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르네상스식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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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풍의 건축물로 남아있는 건물들로 주로 사무소나 커피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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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풍 건물들의 거리. 당시에는 최신식 건축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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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풍의 건축물사이로 교회가 서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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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을 상징하는 성인 공자상(像).청도시에서 제작하여 기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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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을 상징하는 솟을대문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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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거리 중심지에는 계단에도 상징문이 그려져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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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거리의 중심부에 있는 중국풍의 건축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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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만두가계 앞에 익살스런 인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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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색으로 장식된 거리의 가로등과 깃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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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통 붉은 색으로 장식한 중국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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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깃발이 펄럭이는 중국인 거리 |
[그린경제/얼레빗 =최우성 기자] 1876년 조선말 남의 땅을 측량한다고 들어온 일본의 배를 격침하자, 이를 기화로 일본은 함대를 파견하여 강제로 인천항이 개항된 이래 외국문물이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지금은 차이나타운으로 변모한 인천에는 인천항과 인접한 언덕 위에 자유공원이 있고, 그 언덕주변에는 당시 신물물의 유입지로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이 자리잡았다. 중구청 쪽에서 시작되는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중심에는 계단이 있는데, 계단의 왼쪽에는 청나라 사람들이 계단의 오른쪽에는 일본사람들이 터를 잡았다.
일본인들의 거리에는 관공서, 교회, 은행, 사무소등이 들어서있고, 중국 사람들이 자리잡은 거리에는 주로 중국 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서있다.
한 때 외국문물들이 넘쳐나고, 돈이 굴러다니던 이곳이지만 재개발이 안되어 낙후한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그런 시련의 긴 세월을 보내고, 이제는 이곳이 근대화의 상징거리로 조성되면서 차츰 근대건축물을 되살려 역사의 거리로 탈바꿈하고 있다.
그리하여 옛건물들의 뼈대를 살려서 외관을 보완하고, 실내분위기도 일본이나 중국을 느낄 수 있도록 가꾸니, 많은 한국인들이 다시 찾는 거리로 그 이름을 날리고 있고, 또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한국 속의 이색적인 거리를 알고서 찾는 이들도 많아졌다.
생각하면 너무도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역사의 거리이지만, 이제 한국인들에게는 그 아픈 상처 속에 다시는 겪지 말아야 할 다짐을 하는 교육의 장소로 거듭나고, 외국인들에게는 우리의 근대화 시작점임을 알리는 관광명소로 다시금 태어나는 인천광역시 중구 거리는 중국과 일본의 당시 정경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비탈진 개항지를 돌아보고 느낀 것은 일본인 거리는 깔끔한 듯 하지만 건축물 색깔이 짙은 회흑색이라 우중충한 느낌이 들었다. 반면 중국인 거리는 붉은색 건물에 붉은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어 활기차 보였다. 요즈음 한국과 중국이 그런대로 잘 통하는 반면 일본과는 계속되는 엇박자를 내는 것 같은 느낌이 인천 차이나타운을 돌아보며 느낀 느낌이다.
근대화의 역사거리는 지하철을 타고 동인천역에 내리면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고, 한나절을 걸어서 역사의 거리를 느껴보고, 출출하면 맛있는 식당에서 이국적인 식사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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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