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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한 허균, 허난설헌 생가. 신분과 계급이 먼저인 사회에서는 아무리 큰 뜻이 있어도 용납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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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균 ,허난설헌의 옛집 안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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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의 다른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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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의 뒷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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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 모습. 건물이 지붕을 서로 맞대고 있는 'ㅁ'자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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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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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균과 허난설헌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전시관 |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그의 누이 허난설헌의 기념관은 강릉시 초당동 477-8 번지 경포대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500년 전 허씨 5문장가의 인물로 5문장가란 허균의 아버지 허엽과 허균의 형제 허봉, 허초희, 허성을 일컫는다.
이들 가운데 잘 알려진 인물이 교산(허균)과 난설헌(허초희)이다. 허균은 시대를 앞서간 탓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허초희 또한 남녀차별의 신분제 사회에서 태어나 자신보다 못한 남편을 섬기며 뛰어난 기량을 맘껏 펴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아깝게 생을 마감했다.
허균은 1569년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상관찰사를 역임한 허엽의 정부인에게서 세째아들로 태어나 당시 사회에서는 신분상 하등의 지장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가르쳐준 스승(이달)은 서자출신이었고, 그와 함께 공부했던 많은 재주있는 친구들이 적자가 아닌 서자로 태어나 과거도 볼 수 없는 신분 차별을 목격하면서 사회모순을 피부로 느꼈다.
허균은 임진왜란 중인 1594년 선조27년 문과에 급제하고 1597년 다시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공주목사를 시작으로 예조참의, 형조참의 등 핵심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신분제는 반드시 개정되어야할 사회의 핵심 모순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관직에 진출하여 살면서도 신분때문에 관직에 오르지 못한 친구들을 위로하고 그러한 처지에 있는 친구들과 자주 어울려 살았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행동은 당시 주류사회에서 오히려 사상적 위험인물로 낙인 찍히는 결과를 초래하여 요주의 인물로 늘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허균은 뛰어난 문장력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소설을 지었다. 자신이 꿈꾸는 이상세계를 꿈꾸며, 누구나 능력있는 사람이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뜻에서 주인공 홍길동을 창조해낸 것이다.
홍길동은 서자로 태어났기에 과거를 볼 수도 없었고, 자신의 아버지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도 못하는 비참한 조선의 현실을 고발하고,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포기한 대신 무술을 연마하여 의적이 되어 관직을 빌미로 못된 짓을 일삼는 탐관오리 들을 징벌한다.
소설속에서 홍길동은 신출귀몰, 종횡무진으로 전국을 누비면서 관군들을 따돌리고 탐관오리들을 벌줌으로서 백성들의 한을 통쾌하게 풀어주고, 백성들의 응어리를 풀어주었기에 홍길동전은 요즘으로 말하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권력자들과 양반 유생들에게는 불순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당시 광해군은 서자로 왕위에 올랐던 이유로 늘 역모의 위험이 있었는데, 그의 아우이면서 선조의 정실왕비에게서 태어난 영창대군이 자신의 왕위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불안속에 늘 신경을 쓰면서 살았다.
허균을 모함한 자들은 허균이 주동이 되어 영창대군을 왕으로 모시기 위한 역모를 꾀한다는 상소를 올려 결국 허균은 사지가 찢기는 형벌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49살 때이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신음하던 스승과 벗,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이들이 처한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사회개혁을 꿈꾸었던 허균은 끝내 사상적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무고로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하지만 5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사상은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로 재인식, 재평가 받고 있다. 남들처럼 과거에 급제해 부귀영화 누리며 그냥 한 세상을 살다 갔다면 오늘 우리가 허균, 그의 생을 되돌아보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한 세상을 살아야하는지 강릉의 허균, 난설헌 기념관을 둘러보며 깊은 상념에 젖어본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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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