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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임금이 임금답기 위한 화성(華城)의 연무대

 

   
▲ 연무대 전경 넓은 마당에서 무술을 겨루고 연마했다.

   
▲ 연무대 정면

   
▲ 연무대 측사면

   
▲ 연무대 현판

   
▲ 출입문에서 본 연무대

   
▲ 연무대 출입문

   
▲ 연무대 창고, 병사들의 무술연마에 필요한 도구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연무대 내부 건축구조

   
▲ 연무대 기단부

   
▲ 연무대 상징기가 펄럭인다.

   
▲ 연무대 옆문에서 본 동북공심돈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뒤, 새로운 정치를 하기 위하여 세운 화성은 실권을 잃은 조선 후기 임금이 임금다운 임금이 되기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당시 임금은 세습에 의하여 대물림이 되었으나, 임금의 아들이라고 무조건 저절로 임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왕자지만 당시 기득권 세력들의 힘에 기대야 살수 있었고, 임금의 종친보다는 외척들의 비호하에 외척과  권신들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지 않으면 생명조차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임금은 임금이로되 집권세력들의 살벌한 기운이 언제나 대궐의 주변에 뻗어있었고, 집권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다른 파벌에게 빼았기지 않기 위하여 자기들 끼리만 더욱 더 파당을 짓고 잇권을 나누어 가졌다. 그리하여 집권세력들은 명목상 임금을 떠받들되, 실권은 자신들과 뜻이 맞는 사람들이 파당을 지어 온통 휘둘렀다. 그리니 백성은 한시도 편할 날없이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살벌한 정치 환경속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뒤주속에 갖혀 죽어가는 것을 보았던 정조는 명목상의 임금이 아니라 실제로 임금답고자 고민에 고민을 한 끝에, 당시 권문세족들이 가득한 한양을 벗어나야 한다는 구상을 하였고, 그를 실천하기 위하여, 먼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성(융릉)으로 옮기고 그 옆에 새로운 도시 '화성'을 건설하여, 이와 덧붙여 신시가지를 계획하여 온갖 관아와 궁을 대신할 행궁과 백성들이 살아갈 시장과 집들을 짓게 하였다.

정조는 이런 일들을 당시 그가 가장 신임하던 젊은 신하 정약용에게 화성의 건설에 감독직을 수행하게 하였고, 정약용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화성은 불과 2년 만에 성곽과 관아와 백성들이 살아갈 터전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완성의 첫 행사로 자신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이곳 화성의 행궁에서 거행하였다.

그런데 백성을 잘 살피려해도 힘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터득한 정조는 당시 사대부 집권층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힘이 길러야 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추진할 수 있고, 자신의 신변도 확실하게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성의 한 편에 넓은 무술 연마장으로 이곳 연무대를 건설하고, 장용영이라는 새로운 부대를 창설하여  당시 전해오던 조선의 무술을 집대성하여 24반 조선무예를 총망라하여 '무예도보통지'를 저술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 부대원들의 무술연마를 직접 참관하는 등 자신의 포부를 하나 하나 실천해가고자 하였다.

연무대 마당은 평지가 아닌 상당한 경사지로 되어있다. 이는 전쟁시 자연상태의 백병전을 가상하여 평지가 아닌 경사지를 그대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정조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그가 이룩하고자 하였던 백성들을 잘살게하는 임금다운 임금노릇을 얼마 하지 못하고 말았지만, 그가 건설한 화성은 한때 거의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금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근세에 이루어진 독특한 성곽문화로 독창성을 인정받아, 이제 다시 세계문화유산이 되어 많은 세계인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비록 정조의 꿈은 사라졌지만 그의 이룩하지 못한 꿈을 되새기는 장소가 되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백성은 살기 어렵다.임금은 누구나 백성을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고자 하나, 기득권으로 권력과 부를 손에 움켜쥔 사람들은 그 권력과 부를 자신들의 패거리들이 나누고, 그 나눈 권력들은 대를 이어 자신들의  자손들에게 언제까지나 물려주려고 한다. 그러니 시대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집권자는 개혁하고자 하는 마음을 잠시라도 쉬면, 금새 기득권자들의 포로가 되어버리고, 백성의 한숨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 시대도 늘 개혁을 말하고 민생을 말하지만, 말이 말잔치로 끝나버리고 나면 결국  집권세력의 포로가 되어, 국민을 위하여는 어느 것도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