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홍범도 장군의 얼굴 오른쪽 볼수염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위로 자랐드랬소. 왜냐하면 너무나도 총을 많이 쏘았기에, 총을 쏠 때마다 총탁을 오른 쪽에 대기 위해 오른쪽 볼을 스쳐 겨냥하면서 올렸기 때문이오. 총 쏘는 내기도 몇 번 해보았는데 정말 명포수였소. 노년이었지만 우리 젊은 것들이 어쩔 수 없었소. 극장 수위로 일하실 때 우리는 처음 그가 그 전설적인 영웅인, 일제에 있어서는 범인인 홍범도인 줄 몰랐드랬소. 김세일이 소설을 쓰고 태장춘이 희곡을 쓰고 하면서부터 우리는 알게 되었고 그를 무한히 존경하였소. 그는 자기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겸손한 분이었소.”
이는 고송무가 쓴 《쏘련의 한인들》(이론과 실천 펴냄)에 나오는 카자흐스탄 조선극장 배우인 안 미하일 쓰쩨빠 노위츠의 증언입니다. 오늘은 독립운동가 홍범도(洪範圖, 1868 ∼ 1943) 장군이 태어난 날이지요. 홍범도 장군은 1907년 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여러 포수들과 함께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한 뒤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과 9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전멸시켰는데 한때 갑산을 완전히 장악하였지요.
▲ 1921년 무렵 찍은 권총을 찬 홍범도 장군
그는 1910년 조선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점령되자 부하들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부대를 편성, 갑산·혜산·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하고 만포진 전투에서 70여 명을 사살하였지요.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제19사단의 병력 등으로 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습니다. 이 봉오동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가운데 가장 큰 승전으로 기록됩니다.
또 같은 해 9월에는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청산리전투” 하면 김좌진 장군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연변대 교수 박창욱 같은 연구자들에 따르면 “청산리전투는”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이 3주역이며, 특히 20살의 이범석, 31살의 김좌진 보다는 52살의 홈범도가 더 큰 전과를 올렸다고 말합니다. 홍범도 장군은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 이주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으로 가서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76살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동안 김좌진, 이범석에 견주어 그다지 조명되지 않은 홍범도 장군은 의병장과 독립군 지도자로 혁혁한 공을 세운 분입니다. 오늘 탄신일을 맞아 홍범도 장군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 카자흐스탄에 있는 그의 무덤도 하루 속히 고국으로 모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