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젓갈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헌상 기록은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1145년에 완성한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에 나옵니다. 신라 신문왕이 8년(683년)에 일길찬 김흠운의 작은 딸을 왕비로 맞을 때 비단,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따위와 함께 해(醢) 곧 젓갈 135수레를 주었다고 되어있어 이때 이미 궁중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젓갈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늘 먹던 음식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고려 사람들의 젓갈 사랑을 짐작할 만하지요.
또 현존하는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의학서적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1236년)》에는 젓갈을 담그는 방법에 소금에만 절이는 염해법(鹽醢法)과 젓갈 재료에 소금과 누룩, 술을 혼합한 독특한 방법의 어육장해법(魚肉醬醢法)이 있었고, 젓갈과 절인 생선에 익힌 곡물과 채소를 함께 발효시키는 지금과 비슷한 식해(食醢)도 만들어 먹었던 기록이 나옵니다.
▲ 새우젓, 밴댕이젓, 굴젓(왼쪽부터)
그런데 이처럼 “젓갈”이 고려시대에 들어 특히 발달했던 까닭은 고려 태조 때, 도염원(都鹽院)이란 기구를 설치해 나라에서 직접 소금을 만들어 판 소금전매제 정책 덕이었지요. 고려는 소금 가마솥 612개, 소금을 굽는 가구 892개를 설치해 백성들에게도 팔 정도로 충분한 소금 생산을 했습니다. 삼국시대는 이웃나라에서 들여온 소금으로 젓갈을 담았기에 궁중이나 권력층에서만 귀하게 먹었지만, 소금이 비교적 넉넉했던 고려의 백성들은 누구나 젓갈을 먹을 수 있었지요.
이러던 젓갈이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더욱 일반화되는데 헌종(憲宗) 때, 정학유(丁學游, 1786~1855)가 쓴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 “새우젓을 넣은 달걀찌개를 상에 내면 큰 가마의 밥이 부족했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입니다. 또 조선시대엔 이미 젓갈의 종류가 대합젓, 토하젓, 조기젓, 홍합젓, 가자미젓, 밴댕이젓, 굴젓, 새우젓, 멸치젓, 곤쟁이젓, 게젓 따위로 150여 가지가 넘었다고 하지요. 젓갈은 쌀밥이 주식인 우리 겨레에겐 부족할 수 있는 단백질과 칼슘 따위를 섭취할 수 있게 하면서 소화작용까지 돕는 참으로 슬기로운 먹거리입니다. 또 “발효”는 “썩음”으로 넘어가지 않고 “삭음”에 멈춰서는 기막힌 과학의 음식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