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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발해는 우리 겨레였고 발해 땅은 우리 강토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발해 불교유물전

 

   
▲ 대리석 불감, 상 중 하 3단으로 구분된 불감

   
▲ 불감의 상부 , 천상의 세계를 지키는 상서로운 동물

   
▲ 불감의 몸통, 부처님과 좌우에는 보살과 제자가 협시하고 있는 모습

   
▲ 불감의 하부. 부처님을 호위하는 역사가 좌우에 있고, 불감에 대한 설명이 새겨져 있다.

   
▲ 금동보살 서있는 모습

   
▲ 작은 속불들로 발해의 서울인 상경성에서 발굴된 불상들

   
▲ 2불이 함께 있는 모습(석가불과 다보불)으로 법화경을 설법하는 석가불의 설법이 맡다고 증명하는 다보불이 함께 앉아있는 모습이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중인 발해유물임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발해는 한민족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고조선과 부여를 거쳐 형성된 고대왕조로, 한반도 내에 있던 통일신라와 오랫동안 공존하였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발해가 우리와 같은 한민족의 형제왕국이었다는 것을 잊고 살아왔다. 발해는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군으로 공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고구려의 유민들과 그 지역의 또다른 한민족 계열의 사람들이 고구려의 영토위에 다시 세웠던 왕조로 698년~ 926년까지 고조선과 고구려의 고토인 남만주일대에서 한반도 북부지방에서 광대한 영토와 한민족의 문화를 계승하면서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왕국을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고', 한치윤이 '해동역사',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라는 책을 통해서 발해가 한민족이 세웠던 역사의 한 장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전에는 한민족의 형제국이었음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성리학을 성찰하기 시작한 이후에 나타난 실학자들이 자신의 뿌리에 대한 생각을 바로하고 고대 역사서를 새롭게 조명한 자신들의 저서와 이를 바탕으로한 만주지역 현장답사를 통하여 발해를 건국한 이들이 바로 우리의 민족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런 논리에 많은 사람드이 동조한 그 이후에서야 발해는 우리의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 그 이전의 한국의 역사서에서는 발해를 주로 말갈족의 역사로 보거나, 우리와는 별 관계없는 오랑케라고 얕잡아 보았으니,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역사책에는 그 시대를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서로 대치하고 있던 시대라고 하여, '남북국시대'라고 부르지만, 정작 당시에는 통일신라사람들은 발해를 오랑케라고 인식하여 통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지낸 것이다. 그 당시에도 발해를 한민족의 형제민족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발해의 드넓은 강역을 합하는 것은 잘살고 있는 신라사람들이 쓸데없이 원조하여 오랑캐 족속인 발해인들에게 특혜를 주는 것이라는 신라중심의 소중화주의적인 인식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그런 발해는 한 때 '해동성국'이라는 별칭을 얻고, 당나라 일본과 많은 교류를 했다고 하나, 오히려 신라와는 별 교류도 하지 않았다. 신라와 발해는 서로 견제하는 사이로, 이는 사람사이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혈육인 형과 동생이 서로 자기주장을 하다가 심하게 싸우고 나면, 형제간의 정은 뚝 떨어지고,  남보다 더 미운 생각이 들게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이런 경우, 형은 형대로 ''동생이 형도 몰라보고 그렇게 버릇없이 행동럴 수 있느냐며', 동생을 남들앞에서 흉보고 다니는 격이고, 동생은 동생대로 '형이 형답지 못하여 어럽고 힘든 동생을 보살피기는 커녕 깔보고 못살게 굴기만 하니 그럴수 있느냐 "며 남들 앞에서 형을 욕하는 꼴이다.

그러니  '형제가 서로 싸우면 차라리 남보다 못하다' 는 말은, 민족의 역사에서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발해의 입장에서는 본시 고구려였던 자신들을 이 민족의 나라인 당나라와 손잡고 멸망시킨 신라가 한없이 미웠을 것이고, 신라의 입장에서는 저희가 정신못차려 나라안에서 형제가 서로 다투다가 제나라도 지키지 못하고 망한주제에 통일왕국을 이룩한 신라를  형으로도 대접해주지 않은 발해가 미웠던 것이다.

하지만 발해가 멸망한 얼마 뒤에 신라도 진골왕족간의 왕위 쟁탈전이 100여년 지속되고, 신라내 지방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결국 후삼국으로 분파되고  망해서 신라땅에 새로운 왕조로 고구려의 뜻을 되찾겠다는 고려가 들어서자, 발해의 유민들은 고구려의 계승자인 고려로 대거 이민을 오게 되었고, 스스로 한민족의 일원이 되었다. 이로서 서로 '소가 닭보듯 하던 한민족의 남과 북이 250여년 만에 드디어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고려는 추운 벌판인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였던 발해의 만주땅을 사람살기 별로 좋지 못한 땅이라 생각해서 복속하질 않고 외면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한민족의 영토가 한반도로 고착화되는 계기가 된 되었으니 안타깝기 그지 없는일이다. 위 사진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자료전시물 중에 발해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부처님을 모신 불감과 금동불보살상들로 이들을 보면서, 친근한 우리의 북방지역 문화를 느끼고, 한민족의 동질성도 느껴본다.

남북한도 빠른 시일내에 통일을 이룩하여, 한 동안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했다고 서로 미워만 하는 형제가 아니고, 서로 화합하는 형제가 될 날을 학수고대해 본다. 발해가 한민족의 땅이었으나, 우리가 우리땅이라고 주장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남의 땅이 되었듯이, 북한지역 또한 북한의 변고가 발생할 시에는 자칫 중국의 땅이 될 수도 있다는 염려가 많다. 그러자면 서로 대화라도 하고, 서로 무엇인가 상대를 이해하고 양보하려는 마음이 먼저 싹터야 할텐데... 서로 못하는 것만 들추어내고, 내식대로만 하겠다고 고집부려서야 우리가 언제나 한민족의 통일을 실현할 수 있을까 염려만 된다. 어느덧 분단의 70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원수같은 세월도 있었지만, 그러함에도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고 문화가 같은 사람들이다. 

귀하게 전시 중인 국립중앙박물관의 발해유물을 보면서, 언젠가 남북은 한민족으로 한나라가 되어야할 형제요 동포라는 것을 부디 잊지 말았으면 한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