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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기득권을 나눠주려 했던 백성사랑이 만든 한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2859]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세종실록》 26년(1444) 2월 20일 기록에 따르면 세종이 “형살(殺)에 대한 옥사(獄辭)같은 것을 이두 문자로 쓴다면, 문리(文理)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혹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제 언문으로 그 말을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두도 한자의 음과 훈(訓:새김)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이었기에 이도 어려웠던 것이지요.

이에 최만리 등은 “비록 언문을 쓴다 할지라도 무엇이 이보다 다르오리까. 이것은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의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 등은 그 옳은 줄을 알 수 없사옵니다.”라고 장문의 상소를 써서 반박했습니다.

 

   
▲ 훈민정음반포도 (訓民正音頒布圖)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제공

하지만, 세종은 이에 굴하지 않고 훈민정음을 창제합니다. 최고 지식인 집단인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와 학사들이 벌 떼 같이 달려들어 반대를 했지만, 세종이 자신은 물론 사대부들만 알던 한자로부터의 기득권을 나눠주려 만드는 훈민정음 창제를 포기하게 할 수는 없었지요. 글자의 구실은 소통인데 한쪽만 일방적인 기득권을 쥐고 있다면 이미 그건 소통이 아닌 것입니다. 신하들의 말을 듣고 또 들으며 소통을 했던 세종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백성과도 소통하려 했던 것이지요. 지금의 위정자들은 세종처럼 진정 소통하려하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