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묵계월 선생이 대명창이면서도 항상 연습시간을 충실히 지켰고, 누구보다도 먼저 나와 목을 풀고 있어서 연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 자기의 주장이나 목소리를 내지 않고 남을 먼저 배려하는 넓은 마음씨나 그 겸손한 태도가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 그는 1965년도부터 각종 기획 공연들을 통해 경서도 소리의 높은 예술성을 발휘해 왔으며 이러한 활동들이 쌓이고 쌓여 경서도 소리의 저변을 확대하는 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민요 전공자들이 생겨나면서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대도시의 문화원, 또는 사회단체, 초등학교를 비롯한 중, 고등학교에 국악강사가 파견되어 일선학교에서의 국악교육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묵계월의 제자들 가운데 임정란, 최근순, 유창 등은 <경서도 소리극(京西道唱劇)>을 무대에 올리기 시작하여 문화계에 주목을 받기도 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묵계월이 남기고 간 업적은 소리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공연, 소리극, 교육, 학문 등 각 영역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자리를 잡게 되어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인 예술이요 문화로 성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앞에서 묵계월은 20살 이전에 방송을 통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방송을 통해서 그의 소리를 들었거나 또는 무대나 사랑방에서 직접 들은 사람들은 묵계월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고 입소문을 내기 시작하여 그의 이름이 서울 뿐 아니라 전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당시에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묵계월 명창은 작은 키에 동안(童顔)이었다. 전화도 귀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를 만나려면 집 주소를 알아 찾아가는 방법이 유일한 방법이던 시절이다. 하루는 묵계월의 집으로 방송국 사람이 자동차로 모시러 나왔다고 한다.
직원; 계십니까? 방송국에서 나왔습니다.
묵계월; 어서 오세요. 누굴 찾아 오셨나요?
직원; 묵계월 명창을 모시러 방송국에서 나왔으니 들어가 명창께 여쭈워 주시오.
(직원은 묵계월의 용모를 모르기에 도우미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다.)
묵계월; 지금 바로 떠나야 합니까?
직원; 그렇습니다. 빨리 나오시도록 말씀 드려 주시오.
묵계월; 잠시 기다려 주세요.(잠시 머뭇거리자 직원이 독촉한다)
직원; 아가씨, 시간이 없어요. 명창님께 빨리 말씀을 드려 나오시도록 해 주시오.
잠시 후, 단장을 하고 나온 묵계월을 보고 그 직원은 크게 놀래면서 알아보지 못해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TV가 없던 시절이니 얼굴이나 몸매를 모르던 방송국 직원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은 당연하고 그만큼 묵계월은 작은 키에 동안이었던 것이다.
▲ 묵계월 선생(왼쪽)이 제자와 함?께 소리하는 모습
1945년, 해방을 맞은 이후에도 그녀는 경기민요를 부르며 살았고, 부산 피난 시절에도 민요를 놓지 않았다. 피난 시절에도 그는 왜소한 체구에 꾸미지 않는 용모 때문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누구든 그가 노래하는 묵계월이라고 해도 믿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명창 묵계월은 매우 화려한 의상에 배우처럼 예쁜 용모의 소유자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노래 소리를 듣고서야 믿었다는 것이다.
평생 공연장 무대에서 민요를 부르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보낸 지난날들의 보상으로 묵계월은 제1회 ‘세종상’, ‘국악대상’, ‘KBS 국악대상 공로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1974년 이은주, 안비취 명창과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 57호 경기민요의 예능보유자가 된 이후에는 더 많은 공연과 후계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2004년 11월, 조선일보사의 [방일영국악상]은 묵계월에게 돌아갔다. 그때 그를 위해 필자가 쓴 축사의 일부를 소개한다.
“명창 묵계월의 소리 속에는 물도 흐르고 바람도 불며, 구름 속에 달 가듯, 자연의 형상과 자연의 소리가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12곡 중 어떤 노래를 듣는다 해도 그의 소리에는 강약과 명암의 대비가 분명하고, 힘을 바탕으로 하는 역동미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창법이나 시김새를 동반하며 진행되는 다이나믹한 선율선에서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름다운 곡선의 흐름이 마치, 민족의 끈기를 느끼게 한다.
그는 외양(外樣)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즉흥적인 표현을 강조하기보다는 사설의 정확한 발음이나 발성 등의 기본기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런 표현법을 중시(重視)하는 음악적 태도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러한 영향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달이 되어 제자들 대부분은 기본기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제 나이 먹어 힘이 없으니 <예능보유자> 자리를 하루빨리 내 후계자에게 물려주어야겠다고 자진하여 명퇴하는 모습에서 제자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씨도 높이 살 일이다. 우리 속담에 ‘오뉴월 모닥불도 쬐다 물러서면 섭섭하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평생 지켜갈 수 있는 명예를 스스로 내려놓으려는 마음을 비우는 대 명창의 겸손함을 세상이 알 것인가!
건강한 몸으로 우리 곁에 남아 목청을 다듬는 그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고 그의 소리를 사랑한다. [방일영국악상]이 묵계월에게 결정되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다음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