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임진왜란 이후 조정의 곳간은 텅 비었습니다. 심지어 함경도 변경지대의 군사들에게 지급되어야할 동복조차도 마련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변방의 군사들에게 동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국방에 큰 문제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사의 사무를 담당하던 관아인 비변사(備邊司)에서는 고민 끝에 과거시험 낙방자 답안지를 활용하여 동복을 만들어주기로 했습니다. 당시 한지로 만든 옷은 방한복 구실을 톡톡히 했던 것입니다.
▲ 한지로 만든 드레스 (원주한지축제에서)
그래서 비변사는 낙방자 답안지를 확보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시행하는 중앙과 지방의 시험담당관 앞으로 공문을 보내게 됩니다. 공문의 내용에는 “낙방자의 답안지를 철저히 모아 보관할 것, 낙방자의 수와 거둔 답안지의 수가 다를 경우 시험관을 부정한 벼슬아치로 벌을 줄 것.”이란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러자 이 공문을 받아본 시험관들은 발끈하여 임금에게 항의편지를 보냅니다.
“시험 관리도 어려운데 낙방자의 답안지를 모으는 일까지 더해지고, 답안지의 수가 혹 틀리기라도 하면 부정한 벼슬아치라는 누명까지 쓰게 되니 누가 시험관이 되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시험관들은 사대부들로서 적어도 부정한 짓을 저지를 사람들은 아닌데 비변사가 사대부들을 좀 우습게 보는 것인 아닌지요?” 이러한 불만의 소리가 높자 결국 좋은 취지로 시작됐던 “한지 군복 만들기 운동”은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중단되고 맙니다.혹독한 겨울 추위에 이나마도 보급이 안되었다면 그 추위를 어찌 보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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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식으로 한지를 뜨는 모습(원주한지축제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