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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호남의병장 남편과 함께 뛴 "양방매" 애국지사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908년 9월 20일 밤, 장흥 신풍에서 전투를 마친 강무경 의병장은 온 몸에 신열이 나고 피로가 엄습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평소 인연이 있던 영암 금정면의 선비 양덕관(梁德寬) 집을 찾는다. 양 선비집에 도착한 강 의병장은 신음 소리를 내며 누워 있었는데 이를 간호 해준 사람이 양 선비의 둘째딸 양방매(梁芳梅, 1890. 8.18~1986.11.15) 처녀다.

 아버지 양 선비는 이들이 좋은 배필이라 여기고 이들의 혼례를 치러주었다. 강 의병장이 양 선비 집을 찾은 지 이틀만의 일이다. 강 의병장이 몸을 회복하기 무섭게 일본군의 대토벌작전 소식이 들려왔다.

 강 의병장은 채비를 차리고 집을 나서야했으나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아내인 양방매가 따라나서면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말을 하며 갈 길을 재촉했다. “여자가 나설 데가 아니라”며 극구 말렸으나 양방매는 막무가내였다.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인 강무경의 부인 양방매는 남편을 따라 이렇게 항일전에 투신하였다.

   
▲ 94살 때 남편의 무덤을 찾은 양방매 애국지사(1984)

 전북 무주 출신의 강무경이 심남일 함께 전남 함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영암으로 이동한 것이 두 사람을 맺어 주었지만 양방매의 아버지 양 선비와 오라버니 양성일도 20살 청년으로 의병활동을 이미 하고 있었다. 강무경 의병장과 양방매는 집을 떠나 1년째인 1909년 10월 9일 전남 화순군과 능주면의 바람재 바윗굴에서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전남 동남부 일대 산악지방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1년 동안 이들은 장흥·보성·강진·해남·광양 등지에서전투를 벌였다.

 특히 1909년 3월 8일 강무경 의병장은 남평 월교리에 머물다가 일본군 15명이 운곡으로 갔다는 보고를 받게 된다. 이에 작전계획을 세운 다음 본진을 장암에 두고, 의진을 5개 부대로 나눈 뒤 대치·대항봉·월임치·덕룡산·병암치 등지에 매복시켜 놓고 유인작전으로 협공을 벌여 다수의 일본 군경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1909년 9월부터 일제가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여 호남의병에 대해 파상적 탄압을 가해오자 10월 9일 강무경과 함께 양방매도 체포되고 말았다. 남편 강무경 의병장은 1910년 9월 1일 심남일과 함께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고, 체포 당시 양방매와 심남일의 부인은 나이가 어리다고 풀어주어 가까스로 목숨만은 건졌다.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강무경 의병장의 나이는 32살이었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나라의 광복을 보지도 못하고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천추의 핏자국을 남긴 청강석이 되리라”는 말을 남기고 꽃다운 아내와의 이별을 고했다.

남편 강무경 의병장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양방매 애국지사는 스무 살 청상과부의 몸으로 의병 활동을 하다가 병사한 오라버니의 딸 등 친정조카를 기르며 모진 세월을 살아내야 했다.

 양방매 애국지사는 남편과 사별한지 74년째인 1984년 8월 14일 서울의 국립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86년 9월 28일 96살의 일기로 양방매 애국지사는 남편의 뒤를 따랐다. 죽어서 비로소 이들 부부는 함께 할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