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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흥미진진한 궁궐 암투가 서린 명릉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

   

   
▲ 홍살문 밖에서 본 명릉의 전경

   
▲ 홍살문 안에서 본 명릉의 전경

   
▲ 정자각에서 본 능상의 모습

   
▲ 능의 아래에서 본 석물들(문인석 무인석 석마 망주석)

   
▲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

   
▲ 문인석 무인석 그리고 망주석 석마

   
▲ 장명등

   
▲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주변에 있는 난간석

   
▲ 무인석

   
▲ 문인석

   
▲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뒤에서 본 전경

   
▲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에서 본 인원왕후의 능

   
▲ 인원왕후의 능에서 본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 인원왕후의 능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오릉이란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을 중심으로 볼 때 서쪽에 5기의 왕릉이 있다는 뜻으로, 한양의 동쪽에 9기의 능이 있는 곳을 동구릉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인데 그것이 이름이 된 것이다.   

1600년대 조선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당쟁의 격랑 속에 죽음을 당하였고, 왕비로 살던 사람도 한 사람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런 까닭에 후세들에게는 왕좌를 둘러싼 이야기 거리가 많아 지금에 와서도 드라마의 소재가 되어 서민들에게 안방극장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이미 여러 차례 걸쳐 영화도 되고 드라마도 되었지만, 그 때마다 흥행에 성공하니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차림상이 된 것이다.  

그들은 조선조 19대 임금 숙종과 그의 여인들이며, 그 중에 악녀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장희빈과 가진 고난 속에서도 살아남아 결국 다시 왕비가 된 천사 같은 여인은 인현왕후다. 두 여인은 숙종을 사이에 두고 서로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몸부림쳤고, 장희빈은 왕비가 된 뒤에도 폐서인이 된 인현왕후를 죽이려는 모함도 서슴지 않았다. 

장희빈(장옥정)은 어린 시절 궁녀로 들어 당시 궁녀의 신분이었으나, 숙종의 눈에 들었다. 그러나 궁녀를 가까이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명성왕후(현종의 비, 숙종의 모친)의 눈 밖에 나서 궁 밖으로 내침을 받았는데(1680), 1683년 명성왕후가 승하한 뒤 숙종은 장옥정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고(1684), 그녀에게서 왕자 ''을 낳았다. 그가 후에 왕이 된 경종이다. 장옥정은 아들을 낳고 장희빈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숙종의 원비는 인경왕후인데, 인경왕후(1661~1680)1670년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1674년 숙종의 왕비가 되었으나, 후사를 잇지 못하고 1680(20) 역병인 콜레라로 죽고 말았다. 인경왕후가 죽은 뒤 제1계비로 들어 여인은 인현왕후였으나, 그녀는 왕자를 낳지 못하는 사이에 장옥정은 숙종의 눈에 들어 왕자를 생산하여 더욱 사랑을 받게 되었다. 

당시는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심했던 시기로 당시에도 정권을 잡고 유지하기 위하여 왕실과 깊은 인척관계가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인현왕후의 뒤에는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이 있었고, 장희빈의 뒤에는 남인계열이 있었다. 숙종은 장옥정이 낳은 아들 윤을 원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서인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고, 숙종은 반대세력인 서인을 제거하는 기사환국을 단행하였다. 이때 서인의 대표였던 송시열도 사약을 받고 죽고 말았으며, 인현왕후 또한 폐서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장희빈은 1689(숙종15)에 왕비가 되었고 남인들이 실권을 갖게 되었다. 

한편 왕비가 된 장희빈은 사저로 쫓겨난 인현왕후가 언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살다가, 무당의 꼬임에 빠져 사저로 쫓겨난 그녀가 없어져야만 자신의 자리가 튼튼할 것이라 생각하고 인현왕후가 죽기를 취선당에 제웅을 만들어 저주하며 빌었다 

이 사실을 알았던 것은 영조(연잉군)를 낳은 궁녀 최씨였는데, 최씨는 본래 인현왕후의 시중을 들던 궁녀였다. 궁녀최씨는 이 사실 숙종에게 고변하자, 숙종은 장희빈을 내치고 다시 인현왕후를 궁으로 불러들여 복권시켰으며(갑술환국), 반대로 장희빈은 내쫓겨 결국은 사약을 받고 죽게 되었다.  

이로써 남인정권도 몰락하였다. 인현왕후는 다시 왕비로 복권 되었지만 복권된 지 얼마 살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 숙종은 그녀를 서오릉의 명릉에 묻었고, 훗날 자신도 인현왕후의 곁에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여 유언처럼 지금의 명릉이 쌍릉(숙종과 인현왕후)으로 조성된 것이다. 

그런데 숙종은 인현왕후가 승하한 뒤 왕비자리를 비워둘 수가 없어서 1년 후 다시 계비를 들였는데 그가 바로 제2계비 인원왕후(1687~1757)이다. 인원왕후는 숙종이 40(1702)가 된 뒤 왕비가 된 여인으로 당시 16세였다. 인원왕후는 16세에 궁에 들었으나 왕자 공주를 낳지 못하고, 경종이 왕이 되자 대비가 되었다가 영조가 왕이되자 왕대비가 되었다. 인원왕후는 숙종이 승하한 뒤로도 35년을 홀로 살다가 71세에 승하하였다. 그녀는 살아서 숙종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지만 죽어서는 왕비로서 숙종의 곁에 묻히기를 소원하였다. 그러나 숙종의 곁에는 이미 인현왕후가 있었기에 그곳에 가지 못할 숙명이었다. 

그런데 인원왕후는 경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영조(연잉군(1694~1776))7살 차이에 불과 하였으나, 연잉군을 낳은 최숙빈(1670~1718)은 인현왕후를 시중들던 궁녀출신으로 궁에서 생활하다가 숙종의 눈에 들어 왕자를 낳게 된 여인으로 궁녀 무수리에서 비빈 중 한사람인 숙빈의 지위에 올랐으나, 자신의 아들인 연잉군은 원자가 되었어도 자신은 왕비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이는 숙종이 장희빈과 같은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법도를 정하여 이후로는 궁녀가 왕비가 되는 것을 금지한다는 어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한편 왕자시절 궁궐 내 암투로부터 보호해줄 언덕이 별로 없었던 연잉군은 늘 불안한 채 생명의 위협 속에 살았다. 이런 연잉군을 자신의 아들딸이 없었던 인원왕후는 세력다툼 속에서도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되게 하였고, 세제시절에도 몇 차례의 죽을 고비 때마다 적극적으로 보살펴주었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영조는 나중에 임금이 된 뒤에 7살 연상의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보살폈다고 한다.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한 후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가 영조 33(1757) 승하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숙종의 제2계비인 인원왕후도 정성왕후 승하한 뒤 115일 만에 승하하여 조선은 같은 해에 국상이 겹치게 되었다. 그런데 먼저 죽은 정성왕후의 장지로 이미 서오릉내에 홍릉을 조성하던 중인지라, 나라의 재정도 아낄 수 있는 방안과, 또 인원왕후의 소원도 들어줄 수 있는 방안으로 인원왕후의 장지를 명릉이 굽어보이는 곳에 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왕릉 중 합장한 쌍릉과 그 쌍릉을 굽어보는 위치에 왕비의 능이 조성된 곳이 서오릉의 명릉이 유일하다. 당시 세상은 당파의 줄을 서지 못하면 궁궐 내에서나 궁궐 밖에서나 살아나기 힘들었다. 목숨이 경각에 처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던 영조는 조선의 가장 치열했던 당쟁의 시대를 마감하고자 각계 당파를 고르게 등용하는 탕평책을 써보기도 했었지만 끝내 당파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조선조의 당쟁이 지금의 정당정치라고 비유를 하기도 하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견강부회를 밥 먹듯 하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상대당의 수뇌들을 공격하여 사약을 내려 제거하는 일들이 많았던 조선조의 당쟁은 아무리 좋게 보아주고 싶어도 보아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