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사복시(司僕寺)는 조선시대 병조에 소속된 기관으로 말 사육과 전국의 목장, 임금의 가마 따위를 관장하는 기구였습니다. 조선의 사복시 제도는 태조 1년(1392)에 고려의 제도를 기초로 한 것으로 《경국대전》이 완성될 무렵 사복시는 정3품 아문의 관청으로 정비됩니다. 사복시의 지방조직인 목장은 《세종실록》지리지에 53개, 《동국여지승람》에 87개, 《대동여지도》에 114개, 《증보문헌비고》에 209개가 전해지고 있지요. 지금의 성동구 일대에 비교적 규모가 컸던 살곶이 목장이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이곳은 호랑이가 나타날 정도로 숲이 우거진 곳으로 중종 21년(1526)에는 커다란 호랑이가 살곶이 목장에 나타나 말을 상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마정(馬政)은 군국(軍國)의 중한 일인데, 각도에서 생식하는 말이 눈비로 인하여 많이 죽게 되니, 비옵건대, 한 섬 안에 초가 서너 곳을 적당히 지어서 말들로 하여금 추위와 더위를 피하게 하고, 또 목자들로 하여금 매년 늦가을에 들풀을 베어서 쌓게 하여, 눈바람과 배고픔과 추음에 대비하소서. 또 근래에 무릇 말을 기르는 사람이 대개는 모두 거세한 말을 만들어서 종자를 없애니, 비옵건대, 이제부터 조정과 민간에 알려 임의로 거세하지 못하게 하고, 병이 있어 반드시 거세해야 할 것은 서울에서는 병조에 고(告)하고, 외방(外方)에서는 수령에게 고하게 하여, 그 허위와 사실을 학인하여 도장을 낙인(烙印)을 찍은 연후에 거세하도록 허락하소서.”
▲ 사복시 목장 지도 (문화재청 제공)
이는 태종실록 13권 (1407) 3월 29일 치 기록으로 이와 같은 사복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는 꽤 많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복시가 얼마나 중요한 기구였나 생각 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목장 모습은 어땠을까 궁금해지는데 이런 궁금증을 덜어주는 살곶이 목장을 그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95호 사복시 살곶이 목장지도 (司僕寺箭串牧場圖)가 전해 내려와 당시 목장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살곶이 목장지도를 만든 것은 1789년에서 1802년 사이로 추정되며 그린 사람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중요한 병력인 말의 사육과 관련된 살곶이 목장의 전부를 이해하는데 이 지도가 아주 귀한 자료임에는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