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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이동로. 해상권을 발판으로 재기를 꿈꾸었던 이들의 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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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파두리 항몽유적지 관공서가 있던 자리에 전시관이 있고, 그 입구에 세워진 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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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몽 유적 건물지. 그 안에는 발굴된 유물이 전시된 유물관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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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세워진 고려 삼별초군의 항몽 순의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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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로 쓰이던 건물지의 발굴된 모습(초석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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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후 무너진 토성들을 발굴조사 자료에 따라 현재 복원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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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다짐하면서 토성을 쌓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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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을 쌓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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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지어 다짐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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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지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그릇들과 나무로 만든 말먹이통(구시) 길이가 3~4m에 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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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 파편들. 제주까지 가지고 와서 쓰던 그릇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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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인들이 제주도 백성을 괴롭히는 모습(벽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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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을 쌓기 위해 동원된 백성들의 노역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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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항몽 의지를 그린그림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금부터 700여년전 몽골은 초원에 흩어져 살던 몽골계 유목부족을 통합하여 나라를 건국하였다. 초원에서 시작하여 말과 양을 치며 살던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데 양을 모는데 필요한 도구였던 말을 전쟁의 첨단 전쟁 무기로 만들어 최고의 말타는 기술에 기마병 전술을 활용하여 세계 최강의 군대로 조직되었다.
그들은 기마병의 신속한 전법으로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을 병합하였고, 초원의 서쪽으로 고비사막 타클라마칸사막을 넘어 아프가니스탄을 경유하여 유렵 폴란드까지 진경하였다. 지구 역사상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전무 후무한 최대의 영토를 가진 제국을 건국한 것이다. 징기스칸은 이렇게 점령한 점령지에서, 복종하는 지역에는 몽골분국을 세우고 자유럽게 살도록하고, 집권층에는 기존 기득권을 부여하여 다스렸다. 복종하지 않는 지역에는 무자비한 도륙을 시행하고, 몽골 분국을 세워서 다스렸다. 당시 잔인한 몽골군대들의 공포는 서양 역사에 "지옥에서 온 악마와도 같았다"고 기록되었다. 이들 앞에 맞서는 군대가 없었으며, 맞서서 싸웠다 하더라도 전투에 승리한 나라가 없었으며, 한번 패한 나라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몽골의 분국으로 복속되고 징기스칸의 후손과 친족들이 왕으로 앉혀졌다. 이들 나라에 2번 이상 전투를 한 나라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세계를 점령해 나가던 몽골은 고려의 북쪽에 있던 금나라와 중국대륙의 송나라를 복속한 후에 조공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인 고려에 처음에 화친사절을 보내왔다.
그러나 고려는 몽골의 화친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모욕을 주었다. 몽골 황제가 화친의 뜻으로 보낸 몽골의 특산물인 낙타들을 음식도 주지않고, 개경의 만부교 아래에서 굶어죽게 하였고, 사신으로 왔던 장군'저고여'는 돌아가는 길에 의주에서 자객에 의해 죽었다. 이때는 1224년 경이다. 이에 격분한 몽골은 고려로 침략을 감행하였다. 당시 고려는 최씨 무신정권기로 '최우'가 집권하고 있었고, 당시 고려의 왕은(고종)은 명목상 왕이었지 실권이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시작한 몽골의 침략은 고려를 3차례에 걸쳐 침략해왔다. 1231년 1차침략시 고려는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화친을 청하였고, 이에 몽골은 역사적으로 용맹하기로 유명했던 고려가 싸우지도 않고 화친을 청하자, 싸우지 않고 이겼으니 최선의 승리라 평가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고려는 화친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1232년 몽골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고려를 응징하기 위하여 다시 2차참략을 감행하였다. 2차침략시 몽골 대장군으로 왔던 아라비아 송나라 금나라에서 전투의 성과를 올렸던 맹장 살리타이는 처인성(용인)에 진을 치고 있다가 불교의 스님이면서도 명궁이었던 김윤휴장군이 쏜 화살 한방을 맞고 즉사하고 말았다. 싸움 한 번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대장군을 잃어버린 몽골군은 그 즉시 퇴각하고 말았다. 세계 최강의 기마병이라는 명성도 무색해지고 말았던 순간이다.
2차침략에서 황망하게 퇴각한 몽골군은 1235년 더욱 철저히 준비하여 다시 3차 칩략을 감행하였다. 고려는 이에 대비하여 정부를 강화로 옮기고 강화도와 김포사이에 흐르는 쉽게 건널 수 없는 해협을 방어선으로 침략에 대비하였다. 몽골은 피난정부를 압박하기 위하여, 고려의 전 국토를 초토화 시켜나갔다. 몽골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고려의 전국이 불타는 가운데 당시 고려의 최고 보물이었던 600년대 지어졌던 황룡사의 9층탑과 대구 부인사에 보존되었던 초조팔만대장경도 불에 타서 없어졌다. 몽골은 고려가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이 지켜주는 나라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부처님 힘의 원천이라고 믿고 있던 경주 황룡사의 전각과 9층목탑 그리고 대구 부인사에 봉안되었던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팔만대장경을 없애버린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불타버린 황룡사를 다시 세우지 못했지만, 다시금 백성들의 원력을 모아 강화도 피난정부에서 팔만대장경을 재조하였다. 그때 만든 대장경이 오늘 해인사에 봉안된 해인사 팔만대장경인 것이다.
한편 몽골이 침략해오자 고려는 실권이 없는 왕과 실권자 최씨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왕은 왕다운 왕이 되고자 자신의 실권을 찾기 위하여 몽골을 이용하고자 하였고, 이를 눈치챈 몽골은 첩자를 왕에게 보내서 관군과 몽골군대가 합작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긴 고려의 무신정부 압박하였다. 이에 고려관군이 강화로 가는 수군의 앞잡이가 되어 몽골군과 연합한 연합군의 공격으로 고려 최씨정권의 군대는 강화도 전투에 패하여 수 백척의 배들을 이용하여 서해로 빠져나갔다. 이들은 처음에는 진도로 근거를 옮겨서 해상권을 장악하여 물자를 수급하고, 고려 각지의 세금을 걷어들여 다시 재기의 발판을 삼고자 했으나, 이곳까지 어온 고려관군과 몽골군에 패하였고.,또 다시 쫓기어 결국 고려의 최남단 제주까지 퇴각하고 최후의 피난정부를 세웠던 것이다. 그것이 제주 항파두리에 세워진 고려의 항몽유적이다.
고려의 저항군은 최씨무신정권의 호위무사들이 중심이 된 3별초군이었다. 이들은 고려 정규군과는 다른 무신정권의 수호를 위한 귀족들의 가문을 지키는 사병들이었으나, 그들은 무술실력이 뛰어나 정규군대보다 오히려 막강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관군은 몽골군과 한통속이 되었으니. 최후의 보루를 제주에 두고서 험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언젠가 또 다시 육지로 나가서 나라를 세우겠다던 무신정권의 꿈은 결국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 의해서 영원히 사라졌다.
세계최강의 몽골군대에 맞서서 수 십년을 싸웠던 고려삼별초군의 기상만은 길이 전하고 있다. 고려는 스스로 황제임을 내세웠고, 주변국들도 인정했다. 몽골조차 처음에는 화친하기를 원했고 침략은 최후에 감행하였다. 세계 최강의 몰골군이 2차 침략시에는 대장군이 화살 한방에 죽게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각하였고, 3차 침략시에는 그래서 더욱 철저히 그 뿌리조차 없애려고 하였다. 그렇게 고려는 몽골의 속국(부마국=몽골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해야하는 나라)이 되었지만 몽골이 세계를 정복하고 세웠던 몽골의 분국은 아니었다.
고려가 이후로도 150여년을 고려라는 국호를 쓰면서 몽골의 부마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라는 이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그 명맥만이라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헌신했던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이장용'이다. '이장용'은 고려가 몽골에 완전히 복속되어 분국이 되거나 몽골의 한 주가 될 운명에 처해있을 때, 고려의 왕이 몽골 황제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게 하고, 나라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면 고려라 이름하지만 그것이 바로 몽골황제의 나라와 같은 것이라고 설득하여 몽골 황제 쿠빌라이칸(징기스칸의 손자)의 허락을 얻고 나라의 이름이 없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후에 이장용은 적국이었던 몽골에서도 동방의 현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당시 70대 노구를 이끌고 수천리 몽골을 말을 타고 3차례나 왕복하여 쿠빌라이칸을 설득했다고 한다. 한민족이 나라를 세운 이래 수천년 동안 이민족의 침략은 받았지만, 많은 부침의 역사는 있었지만, 결코 한민족의 나라가 없어지는 수모는 격지 않고 한민족의 명맥을 이어온 나라인 고려는 그렇게 하여 국호를 유지할 수 있었고, 왕실은 몽골과 혈연관계를 유지하면서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 남쪽 끝에서도 먼 바다에 있는 토성으로, 몽골과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항파두리 항몽유적을 돌아보니 750년 전 치열했던 전투모습이 떠올랐다. 비록 고려의 정규군은 아니었지만 당당히 세계 최강의 몽골군과 싸워서 최후까지 기개를 꺾지 않았던 이들의 '항몽순의비'앞에 잠시 머리를 숙여 고려인의 기개를 떨치신 이들의 명복을 빌며, 길고 긴 역사속에 이시대를 살고 있는 한사람 한사람 우리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생각해본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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