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내가 들으니, 황희(黃喜)가 하루는 취해서 누워 있는데 비가 내려서 천정에서 물이 새니 우산을 펴 비를 피하면서 아내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우산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우산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 하였다는데 청간(淸簡, 탐욕이 없고 대똑같은 이)으로 말하자면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이는 《인조실록》 8년 (1630) 1월 27일 기록으로 황희 선생(1363년~1452년)이 청빈한 삶을 살았음을 잘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태종부터 세종 때까지 임금의 보살핌과 신임이 매우 중하여 대소사(大小事)를 막론하고 궁중 안의 비밀스러운 일에 이르기까지 의논 할 정도로 황희 선생은 조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방촌 황희 선생은 고려 공양왕 1년(1389)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그 뒤 1431년부터 1449년까지 영의정이 되어 세종대왕을 도와 국정을 이끌었고 관직을 벗은 뒤에도 중대사에 대해 세종의 자문을 해 주며 영향력을 발휘하였지요. 그는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 정비, 문화진흥을 지휘하여 세종대의 태평성대를 이룩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삼천리 제7권 제3호 (1935)>에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설총 선생의 이두,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문익점 선생의 목화재배, 김장 선생의 회례편람, 국방에는 양만춘, 을지문덕, 이순신 장군이요, 정치 식견에는 황희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방촌 황희 선생의 유물들(문화재청 제공)
그런 황희 선생의 유물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번지에 있는 이 유물은 옥으로 된 종이누르개(옥서진) 1쌍, 산호로 된 갓끈 1종, 옥 벼루 1개. 코뿔소 뿔로 된 띠(서각대) 1개, 재산분할문서 1매(분재문서) 따위입니다. 특히 연산군 6년(1500)에 아들 사웅(士雄)에게 논·밭을 지급하고 산호갓끈, 옥 벼루 따위의 몇 가지 보물을 종가집에서 보관하도록 재산분할문서에 밝히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훌륭한 재상으로 일컬어지는 황희 정승은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일수록 더 그리운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