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양주 회암사터에는 남북으로 나란히 남아 있는 2기의 화강암 맷돌이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것으로 경기도 민속문화재제1호로 지정된 맷돌입니다. 조선시대 것은 주둥이가 짧으나 고려시대 것은 주둥이가 길고 타원형에 가까워 고려시대 맷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회암사터 맷돌은 아래쪽을 고정시키기 위한 매함지와 맷돌을 함께 만들고, 맷돌을 돌리는 맷손을 중심부에 박아 놓은 모습 또한 특이한 것이지요. 고려 말 온나라 절의 총본산이었던 이곳의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다니 맷돌도 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양주 회암사는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큰 절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우왕 4)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지공 스님이 창건하기 전에도 1174년(명종 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온 적이 있으며, 보우가 1313년(충선왕 5)에 회암사에서 광지(廣智)에게 출가한 바 있어 이미 12세기에 있었던 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회암사 맷돌들(문화재청 제공)
이 절터 주변에는 보물들이 즐비한데 고려시대 나옹의 행적을 새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를 비롯하여, 지공의 부도와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49호), 회암사지부도(보물 제388호), 나옹의 부도와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50호)과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무학대사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51호), 회암사지부도탑(경기도유형문화재 제52호), 어사대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82호)와 당간지주, 건물의 초석들이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채 남아 있습니다. 불교를 금하는 조선의 명종임금 때 문정왕후는 커다란 규모의 회암사를 짓고 불교 부흥책을 써보았지만 그의 사후 회암사는 불에 타 폐허가 된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