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寒梅莫恨短枝최 매화야 가지 꺾였다고 상심치 말아라
我亦飄飄越海來 나도 흘러흘러 바다를 건너 왔단다.
皎潔從前多見折 깨끗한 건 예로부터 꺾인 일 많았으니
只收香艶隱蒼苔 고운 향기 거두어 이끼 속에 감춰두렴.
▲ 매화 (그림 운곡 강장원 한국화가)
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동계 정온(鄭蘊, 1569(선조2)~ 1641(인조19)이 지은 한시(漢詩) <매화가지 하나 꺾어 병에 꽂고(折梅植壺中)>입니다. 정온은 부사직(副司直)으로 있던 1614년에 영창대군이 죽었을 때 그의 처형이 부당하며, 영창대군을 처형하도록 의논을 일으킨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참수(斬首)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광해군이 크게 분노했지요. 결국 그는 제주도의 대정현(大靜縣)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둠) 되고 말았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임금에 오른 뒤 사자(使者)가 공을 찾아가서 그 사실을 말하고 또 고난을 위로하면서 “왜 당장 가시 울타리를 철거하고 하루라도 편하게 지내지 않소?” 하고 물었을 때 정온은 “아직 명을 받지 못했소.”라며 거절했다고 하지요. 그 뒤 임금의 명을 받은 뒤에야 가시울타리 밖으로 나올 만큼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 정온선생 문집 책판(문화재청 제공)
미수 허목(許穆)이 지은 《동계선생행장》에 “공은 유배생활 중에도 마음을 다지고 행실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하였다. 정온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를 갔던 사람 중 송상인은 바둑을 두고 이익은 거문고를 배워 유배생활의 괴로움을 달래었지만 정온은 언제나 글을 읽었다. 경사를 고증하여 지난날의 명언을 뽑아서 《덕변록(德辨錄)》을 지어 자신을 반성했다.”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위 한시도 강직하고 곧은 성품으로 인하여 귀양살이를 하게 된 자신과 매화의 고결함을 서로 견주어 지은 것이지요. 지금 정온 선생이 그리운 것은 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