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0 (금)

  • 흐림동두천 23.5℃
  • 흐림강릉 30.0℃
  • 서울 24.7℃
  • 대전 24.5℃
  • 대구 28.9℃
  • 흐림울산 27.3℃
  • 광주 26.0℃
  • 부산 23.5℃
  • 흐림고창 25.6℃
  • 흐림제주 29.7℃
  • 흐림강화 22.9℃
  • 흐림보은 24.4℃
  • 흐림금산 25.4℃
  • 흐림강진군 26.3℃
  • 흐림경주시 28.5℃
  • 흐림거제 24.1℃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우리문화편지

전화벨이 울리면 절을 세 번하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2964]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미국인 벨이 발명한 전화는 우리나라엔 1890년 무렵 궁궐 안에 처음 설치되었습니다. 고종은 당시 이 전화를 적극 이용했는데 특히 동구릉에 있는 대비 조씨의 무덤에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해 문안을 드릴 정도였지요. 또 고종은 신하들이 친러파와 친일파로 나뉘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임금이 내린 지시도 왜곡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을 극도로 불신하면서 칙령도 덕률풍(德律風. 텔레폰의 음역)으로 내렸습니다.

그런데 고종이 전화를 하면 전화를 받는 신하는 임금을 직접 뵈었을 때처럼 극진한 예를 다했지요. 먼저 전화벨이 울리면 신하는 전화기가 있는 방향으로 절을 세 번하고 전화를 받아 임금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말소리로만 들리지만 전화기를 임금으로 생각하고 삼배(三拜)의 예를 다했던 것이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전화는 철선(鐵線)을 쓴 탓에 감도가 아주 나빠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전화기가 있는 방 안 사람들은 모두 일손도 멈추고 숨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 우리나라에 처음 놓은 전화, 임금에게서 전화가 오면 절을 하고 받았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고종의 전화 덕에 목숨을 구한 이도 있었는데 바로 김구 선생입니다. 김구 선생은 1896년 황해도 치하포 여관에서 단발에 한복을 입고 조선인 행세를 하는 일본인을 보고 국모 명성황후를 죽인 일당이라고 생각하여 때려죽이고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국모 보수(國母 報讐)” 곧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죄목으로 사형 재가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지요. 이때 입직승지가 “국모 보수”란 죄명을 보고 고종에게 고하자 고종이 인천 감리에게 전화를 걸어 사형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당시 덕률풍(전화)은 김구 선생의 생명의 은인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