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의열투쟁(義烈鬪爭)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투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의열투쟁은 군사단체나 조직을 배경으로 하는 유격전이나 사변(事變) 또는 전쟁과 달리, 독립운동 단체에서 집단적이며 조직적이 아닌 몇몇 사람에 의한 무력투쟁을 말합니다. 경술국치 후 광복단(光復團)의 활동으로부터 시작된 의열투쟁은 1923년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서 그 이론이 체계화 되었으며 의열단·병인의용대·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등의 의열투쟁을 꼽을 수 있습니다.
1930년으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대륙침략이 강화되기 시작하였고 나라 안팎의 독립운동은 침체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어 이를 타개할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게 될 무렵 의열투쟁은 또다시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상해임시정부의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이 돋보이는 활약을 하게 되는데 윤봉길(1908-1932)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가 그것입니다. 물론 홍구공원의 의거는 1932년 벽두부터 도쿄·국내·대련·상해에서 연속적으로 전개된 김구 주도의 의열 활동의 연장선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 동아일보 1932년 5월 2일 자 홍구공원 식장 광경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는 사실상 조선 독립운동사에서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었고,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과 용기를 주었으며 조선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세계에 알린 쾌거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젊은이가 능히 했으니 장하다.”고 당시 장개석 총통도 높이 살만큼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중국에서 조선인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된 쾌거였지요. 오늘은 83년 전 윤 의사가 나라를 되찾고자 목숨을 바쳐 일제국주의에 항거한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