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이 비 그치면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 짙어오것다 이수복 시인은 왜 풀빛이 서럽다고 읊었는지 모르겠으나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서럽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이 착 가라앉고 우울해 지는 건 사실 인 것 같다. 착잡하면 생각이 많아지는 걸까? 창밖 화초에 맺힌 빗방울이 바람에 흩어졌다 다시 맺히는 그 순간에도 기억의 편린들로 제작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지금이야 흔한 게 우산이지만 1960년대와 70년대엔 비닐우산도 귀했다. 그 시절엔 보슬비 정도는 맞으며 걸어가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고 우산을 든 사람은 비를 맞고 가는 사람에게 우산 씌워주는걸 당연하게 생각 했었다. 그때 나는 귀밑솜털이 채 벗겨지지 않은 중학생이었다. 벚꽃낙화가 거리를 하얗게 색칠하던 봄비 내리는 날, 난생처음 사랑의 열병이란 걸 경험하게 된다. 하교 길에 버스에서 내린 나는 우산이 없어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었다. 돌아보니 내가 가끔 들르던 문방구집 딸이었고 그녀는 이미 여고생이었다. 심장은 마구 뛰었고 머릿속은 텅 빈 듯하였다. 한 가지 분명한건 그녀는 자기 집을 훨씬 지나쳐 우리 집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역사시대 이래 남성들은 부권중심제의 울타리 안에서 여성에 비해 많은 특혜를 누리며 살아왔다. 우리 인류의 가계(家系)가 모계에서 부계로 바뀐 데는 국가권력의 탄생이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는 소규모 전투시대에서 대규모 전쟁시대로 넘어올 때쯤으로 짐작된다. 부족국가나 읍락국가에 비해 남성들의 물리력 비중이 절대적으로 커진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진정한 남녀평등이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없겠으나,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여성들의 권익이 과거 보다는 많이 향상된 것 같다. 그리 멀리 소급할 필요도 없이 우리 어머니 세대만 하더라도 여성들은 남존여비사상의 희생물이었다.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밥 짓는 일을 시작으로 농사일과 가사에 허리가 휘도록 내몰렸다. 농한기인 겨울철에도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찬물에다 빨래를 한다거나 다듬이질로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 그나마 남편을 잘 만난 여인네는 마음고생이나마 덜 했지만, 당시 대다수의 남정네들은 그릇된 사회통념의 충실한 추종자들이었다. 식솔들은 배를 곯아도 자기 술 배는 채우고 다녔고 걸핏하면 술주정에다 험악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2000년이 넘는
[우리문화신문=김상아 기자] 그는 게르만 계통이었을 것이다. 물론 미군장교니까 당연히 미국인이겠지만 블론드모발이라든가 벽안(碧眼)이라든가 매머드를 연상케 하는 그의 덩치를 보면 북 게르만 핏줄이 아닐까 추측된다. 세차게 몰아치던 눈보라가 잦아들던 날이었다. 그동안 적막하던 기지촌이 갑자기 활기가 넘쳤다. 외박 나온 미군병사 하나가 연탄가스에 중독돼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사건으로 인해, 한 달 가까이 내려졌던 타운 금족령이 해제된 날이었다. 클럽마다 초저녁부터 미군들의 웃음소리와 취성으로 소란스러웠다. 내가 근무하는 클럽은 주로 늙다리 장교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우리 클럽도 예외 없이 개점도 하기 전부터 미군들이 밀려들어와 음악과 술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복닥거리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을 즈음 늘 그랬듯이 산 그림자 같은 실루엣이 출입문을 꽉 채웠다. 그가 온 것이다. 게르만인 같고 매머드 같은. 그는 늘 혼자였고 나를 자기 아들이라 불렀다. 그는 독점욕도 강해서 나를 독차지 하려하였다. 자기 옆에다 두고 자기와 술을 마시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만 들려 달라 하였다. 그의 계급이 높아서인지 아니면 모든 술값을 그가 책임지기 때문인지 다른 미군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미국 캘리포니아에 폴섬이라는 이름의 교도소가 있다고 한다. 미국 내 교정시설 가운데 두 번째로 오래된 곳이다. 1880년에 개소하여 100년도 훨씬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1800년대 중반에 불어 닥친 골드러시로 캘리포니아 지역에 인구가 폭증하였고, 거기에 비례하여 범죄도 증가 하였다. 그때 그 범죄자들의 수용을 위해 지어진 폴섬감옥은 개소초기부터 악명을 드날렸다. 과밀수용과 비위생은 물론이고 인근 채석장에 내몰려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 뒤로도 최악이라는 명성(?)을 이어오던 폴섬감옥이 1956년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자니 캐시라는 신인가수가 폴섬감옥의 블루스라는 노래를 히트시켜 버린 것이다. 자니 캐시는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폴섬교도소와 나아가서는 미국 내 모든 교도소의 환경개선운동과 재소자들의 권익보호운동에 앞장섰다. 그 하나로 교도소 순회공연에 나선 그는 머잖아 값진 보석을 하나 캐내게 된다. 1958년 샌구엔틴 교도소 공연을 보고 한 재소자가 크게 감명 받아 가수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가 바로 멀 해거드이다. 멀 해거드 역시 자니 캐시처럼 스타가수가 된 이후에 교도소 순회공연을 통하여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도회지의 거리를 걷다보면 행인들의 매무새가 참으로 다양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옷의 모양이나 빛깔도 그러하거니와 머리모양이나 색깔도 옷의 그것에 뒤지지 않을 만큼 각양각색이다. 다양, 다변화된 세상을 살아가는 요즘 청년들은 어떤 형의 여성을 선망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소위 70, 80세대들은 갸름한 얼굴에 긴 머리가 찰랑대는 여성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남성들은 관능미보다 청순미를 선호했다. 일단 머리카락이 길면 겉보기에는 청순해 보인다. 사실 인류역사에서, 특히 우리 민족에 있어서 단발의 역사는 매우 일천하다. 남성의 경우에는 고종 32년인 1895년에 일제의 강압에 의한 단발령으로 그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여성들에게는 강제성이 없었기에 1922년에 가서야 모발 현대화가 이루어진다. 한남권번 기생이었던 강향란이 그 효시이다. 하지만 강향란의 단발은 굳은 의지의 표현일 뿐 미용 목적은 아니었다. 강향란의 단발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해져 온다. 그녀는 1900년 대구에서 강석자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열네 살에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기생수업을 하였는데 예술적 재능이 탁월하여 뭇 한량들이 군침깨나 흘렸던 모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군문을 나선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 코끝이 새까매져서야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주위에선 군대생활 하느라 삼년동안 수고했으니 좀 쉬라고들 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음악실에 가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음악에 목말랐던가? 마이크가 잡고 싶어서 안달은 또 얼마나 났던가? 차창 밖을 내다보며 내일은 어느 쪽을 훑을까 생각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귀가 번쩍 뜨였다. 우리나라에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장르의 음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다시 시내로 향했다. 그리고 군 입대 전부터 자주 드나들던 레코드점 문을 열어젖히곤 이런 음악이 있느냐고 물었다. 주인아저씨는 마침 그 음반이 오늘 들어왔다며 미소 띤 얼굴로 나에게 건넸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뜸 했었지를 듣고 또 들으며 회상에 잠겼다. 미군 클럽을 떠돌던 시절, 소울클럽에서 근무할 때 사귀었던 흑인병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유난히 펑키리듬을 좋아해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출 때면 흡사 몸과 팔다리가 따로 노는 것처럼 유연했다. 나는 그 음반을 사들고 다음날 한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요즘은 지방 소도시에서도 배낭을 둘러매고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외국인을 흔히 볼 수 있다.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외국에서도 여행을 많이 오고 우리도 나라 밖으로 많이 떠난다. 이제는 촌로들도 중국이나 동남아 몇 개국 정도는 다녀오는 세상이 되었다. 해외라고는 강화도밖엔 가본 적이 없다며 농반진반으로 너스레를 떨던 필자도 단 한번 해외여행을 경험하였다. 첫 여행지 치고는 제법 먼 나라인 스페인을 다녀왔는데, 다행히 패키지관광이 아니라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뒷골목 구석구석까지 뒤질 수 있어 좋았다. 라틴문화와 아라비아문화가 혼재된 독특한 문화를 경험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먹거리가 문제였다. 음식이 얼마나 짠지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대도시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이 있어 라면이나 김치 맛을 볼 수 있지만 길을 나서면 늘 파스타로 때워야했다. 스페인 전 지역의 음식이 대부분 짜지만 안달루시아 지방이 유독 짜다. 바다를 끼고 있지만 염전이 없어 소금이 귀하기 때문에 반가운 손님에게는 소금 한 줌을 더 쳐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음식이 그렇게 짜졌다는 민박집 주인의 설명을 떠올리며 외국에 나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새해 첫 날 한섬 해변에서 해맞이를 하고 돌아와 슬기전화(스마트폰)로 찍은 해돋이 장면들을 넘겨보는데 카톡하는 소리가 들린다. DJ선배가 보낸 동영상이었다.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일부를 발췌하여 보낸 것인데 호수의 파문처럼 잔잔한 감동을 주는 내용이었다. 어미 판다는 먹이를 구하러 나왔을 때 눈이 내리면 나무위에 올라가 며칠이고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행동을 다른 동물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 하지만 어미 판다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새끼들이 기다리는 동굴로 갔을 때 사냥꾼에게 노출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이야기를 소개하는 출연자는 덧붙인다. 세상 모든 것을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라는 것이다. 눈으로 보았을 때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마음으로 보면 이해가 된다는 얘기다. 대인관계도 마찬가지여서 저 사람은 도저히 이해가 안 돼.하지 말고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역지사지(易地思之)하라는 것이다. 그 동영상을 저장하며 교주고슬(膠柱鼓瑟)이라는 사자성어 하나를 떠올려본다. 교주고슬은 거문고줄 받침대는 이동을 해야만 다양한 음을 내는데 그걸 아교로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 현경과 영애의 참 예쁘네요 음반 간밤에 흰눈이 왔어요 가지엔 눈꽃이 폈네요 참 예쁘네요 간밤에 흰눈이 왔어요 가지엔 눈꽃이 폈네요 참 예쁘네요 다같이 노래를 불러요 힘차게 손뼉을 치면서 다같이 노래를 불러요 참 예쁘네요 다같이 노래를 불러요 힘차게 손뼉을 치면서 다같이 노래를 불러요 참 예쁘네요 다같이 노래를 불러요 모두 다 즐거운 노래를 다같이 노래를 불러요 참 예쁘네요 참 예쁘네요 가운데서 강원도 산골의 겨울은 유난히 길다. 예전에는 더욱 그랬다. 동짓달이면 벌써 외부세계와 왕래가 단절되는 마을이 수두룩했다. 강원도의 눈은 내렸다하면 한 길이 넘기가 일쑤였다. 이듬해 봄까지 꼼짝없이 마을 안에 갇혀 겨울을 나야 했다. 남정네들은 새끼를 꼬거나 돗자리 짜기, 소쿠리 만들기로 하루를 보냈다. 어쩌다 무리지어 나가는 사냥은 비길 데 없이 재미있는 놀이였다. 아낙네들은 엿을 고거나 콩나물을 기르며 명절준비를 하였다. 그렇게 단조로운 산골마을에 어쩌다 이야기꾼이라도 찾아들면 마을사람들은 반색으로 모셨다. 텔레비전이 귀하던 시절,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에서 이야기꾼의 존재는 오늘날로 치면 저널리스트요, 만능 엔터테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 하성관 노래가 들어있는 대학가요제 음반 표지 추운 줄도 잊어버리고 팽이놀이 하는 동네의 골목에서 노니는 아이들 소리 채찍 맞으며 아픔을 참으며 눈물도 흘리지 않고 그냥 빙빙 말없이 돌아가는 동그란 팽이 돌고 돌아가는 세상 우리 모두 함께 모여 팽이놀이 해 볼까 빙빙빙 돌아라 내 팽이야 빨강 노랑 파랑 줄무늬의 오색의 내 팽이야 빙빙빙 돌아라 세상이 어지럽게 빙빙빙 돌아서 네 자릴 잡아라 돌고 도는 세상처럼 팽이는 돌아간다 얘들아 쉬지 말고 그 팽이를 쳐봐라 하성관 빙 빙 빙 가운데 강에서 번개가 쳤다. 하늘을 찢듯 한 파열음이 들리고 도끼로 언 나무 찍듯 쩡쩡 울리는 소리도 들렸다. 고요할 것 같은 겨울밤은 얼음 조여지는 소리로 여름밤보다 시끄러웠다. 이렇게 바람 한 자락 불지 않으면 얼음이 아주 매끄럽다는 것쯤은 어린 나도 알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자 내 마음은 이미 얼음판에 가있었다. 지난밤 강물은 군용 쓰리꼬다 (three-quarter, 3/4톤 화물트럭, 편집자말)가 건너갈 만큼 두껍게 얼어붙었다. 할머이는 우투케 이래 팽이를 잘 깎어? 이 핼미가 처녀 적에 팽이치기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지. 그래서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