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제주도는 지구의 깊숙한 곳에서 끓고 있는 용암이 분출한 화산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다른 지역과는 지질학적 차이로 인하여, 옛날에는 사람 살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곳이었다. 제주의 토양은 용암이 분출한 돌들로 연중 많은 비가 오지만 물이 고이지 않고 빠져버려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환경이었고, 들판에는 딱딱한 화산바위가 있어 곡괭이도 잘 들어가지 않는 땅으로 밭농사도 지을 수 있는 땅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도 사람들은 비좁은 농토를 갈고 가꾸어 밭농사를 짓고, 넓게 펼쳐진 바닷가에서 어업과 각종 해산물을 채취하며 삶을 이어갔다. 이런 어려운 환경 때문에 그 옛날 제주도는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여겨 큰 죄를 지은 관리들을 귀양보내는 유배의 땅으로도 쓰였다. 그 대표적인 유학자로 추사 김정희를 꼽을 수 있고 스님으로는 허웅당 보우스님 등이 있다. 추사는 귀양이 풀려 다시 육지로 갔지만, 보우스님은 당시 제주목사에게 고문을 당하여 유배지에서 죽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육지에서 삼일독립운동이 벌어질 즈음에 제주 조천진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조천진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이곳 미밋동산에서 열네분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제주도는 화산이 폭발하여 흘러내린 용암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제주도 가운데에 높이 솟아오른 한라산 뿐 아니라, 제주도 이곳 저곳에 펑퍼짐하게 솟아난 작은 산들도 모두가 화산의 분출로 이루어진 것들이고, 분출한 용암이 흘러내려 바닷가에 이르러 제주의 바다는 온통 검은 화산용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암으로 이루어진 바위는 용암 속에 수증기들이 탈출한 구엄들이 많이 있다. 오늘은 제주의 표선면에 펼쳐진 화산석들로 이루어진 바닷가를 살펴본다. 수 천 년 전 솟아오르고 흘러내린 용암이 갑자기 바닷물을 만나 그대로 식어버린 검은 응회암들은 마치 지구의 뜨거운 내면을 보여주는 듯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바닷물이 닿는 곳에는 어김없이 생명체들이 살아 있는 삶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험한 환경이지만 생명이 살고 있는 현장에는 끈질긴 생명들의 향연 속에 또 다른 아름다움도 느껴본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튤립은 백합과의 뿌리식물로, 유럽과 아시아의 가운데인 터키가 원산지다. 둥근모양의 뿌리를 가을에 심으면, 봄에 곧게 줄기가 올라오고 잎이 피어나면서 곧바로 꽃대가 올라와 화려한 꽃을 피운다. 하나의 뿌리에서 오직 하나의 꽃대만 올라오며, 꽃의 색깔은 원색으로 붉은 색은 정렬적이고 흰색은 순수하고, 또 다른 색의 꽃들은 화려하여 튤립꽃은 부유한 귀족이 갖춘 돈과 명예와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튤립은 16세기 후반에 오스만 제국이 세력을 넓히면서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갔는데, 귀족들이 좋아하여 부와 욕망을 상징하는 꽃으로 대유행함에 따라 가격이 폭등하였다. 하지만 그 욕망은 한송이 꽃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으로, 꽃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부질없는 욕망의 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느끼게도 한다. 튤립이 유럽의 귀족들에게 인기가 많아지자 튤립 알뿌리 하나가 집한 채 값과 맞먹기도 했다고도 한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튤립은 꽃을 피운 뒤에는 열매를 맺는데, 열매는 여러 칸으로 나뉘어져 각 칸속에 많은 종자가 들어있다. 꽃이 핀 뒤에 맺은 열매로 싹이 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부분 뿌리의 구근을 분양받아 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산천초목이 기지개를 피고 깨어난다. 봄이오면 식물들은 대부분 잎을 먼저 내지만, 더러는 잎이 나오기 전에 꽃이 먼저 피기도 한다. 그중에 대표적인 꽃이 개나리, 진달래, 목련이 있다. 목련은 나무가 위로 곧게 자라는데, 크게 자라면 10m가 넘게도 자라며, 위로 올라가면서 가지가 옆으로 불규칙하고 무성하게 갈라진다. 목련은 겨울이 오면 무성하던 모든 잎을 떨구고, 새봄에 꽃을 피우기 위하여, 나뭇가지 끝에 꽃을 피우기 위한 눈을 준비 하고, 추운 겨울을 견딘다. 그런데 땅속 뿌리에 얼음이 녹기 시작하고 봄바람이 불기시작하면 준비했던 꽃눈이 커지기 시작하여 봉오리가 되고, 화창한 봄(3월말, 4월초)이 오면 꽃봉오리가 터지고 화려한 꽃을 피운다. 목련꽃의 봉오리는 터지기 전에는 많은 털이 감싸고있어 차가운 봄 꽃샘추위를 견디다 꽃망울을 피우는데, 그때의 봉오리진 모습은 마치 물에서 피어나는 연꽃의 봉오리와 비슷하고 또 꽃으로 피어난 모습도 언뜻 연꽃과 비슷한 모습이다. 그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꽃을 나무에서 피어난 연꽃이라 하여 목련(木蓮)이라 부르게 되었다. 2020년 봄은 코로나19가 엄습하여 봄꽃이 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보각국사는 고려 말 원나라 간섭이 한창이던 충숙왕7년(1320) 경북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충혜왕 복위2년(1341) 승과고시 선종선에 급제하였다. 이때는 몽골의 간섭기로 고려인 모두가 몽골황실의 눈치를 많이 보고 살았던 시기로, 원나라 황실에 뒷줄을 댄 '부원배'들이 실권을 쥐고 고려의 왕실을 흔들던 때이기도 하다. 고려의 서울 개경(개성)에는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원나라에서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고려왕실을 일일이 간섭하였고, 고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원나라에 보고하고 국정에도 깊이 간섭하였다. 그런데 보각국사가 태어난 때 임금인 충숙왕과 그 뒤에 임금이 된 충혜왕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지만, 원나라의 국정간섭으로 고려 임금을 두 번에 걸쳐 교대로 하였다. 당시 요동지역 선양에는 심양왕이란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고려의 전쟁포로 , 항복한 외국인 떠돌이 유민 등의 집단이 많았는데, 이들을 다스리던 임금으로 충선왕은 고려왕을 그만둔 뒤 심양왕으로 있으면서 원나라 황실 및 귀족들과 교우하기도 하였다. 충숙왕때에는 왕고(충선왕의 조카)가 심양왕이었는데, 충숙왕은 고려의 임금이 된 뒤로 백성을 위한 정치에는 소홀하였여, 이 기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우리역사를 돌아보면 태평성대라기 보다는 하루 하루 한해 한해가 모두가 격동의 시절이었다. 멀리 보면 단군의 고조선 이래 5,000년의 역사라고 하지만, 고조선시대의 역사는 대부분 만주지역에 있었다. 이후 5국시대(고구려, 부여, 백제, 신라, 가야)는 기원 전후를 기점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서로 경쟁하며 이어오다가 한반도로 완전히 고착화 된 시점은, 불행하게도 신라가 통일하면서 부터였다.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하였지만, 고구려 유민들은 만주지역에 대진(발해)을 건국하여 230여년을 지속하다가, 한반도 지역에서는 후삼국을 거치며 대진국의 유민들도 고려에 부분적으로 흡수되기 까지 하였으니 한민족이 만주지역을 완전히 잃은 것은 고려시대부터라 고 할 수있다. 고려는 고구려의 뜻을 이어받기 위하여 세운 왕조이나 실상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노력은 별로하지 못하였다. 고려 중기 한때 서경(평양)으로 천도한 뒤 만주를 되찾겠다는 정지상과 묘청의 북진주장파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개경파에 숙청되었다. 이후로 고려는 내부 문신과 무신의 정권다툼을 하다가 결국 몽골족 원나라에 패하여 오랫동안 간섭을 받다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동강할미꽃은 강원도 영월 정선 경계 태백산 주변계곡 동강의 주변에만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뿌리는 흑갈색이며, 뿌리에서 잎이 무더기로 나와서 옆으로 퍼진다. 꽃은 3월 말에서 4월 초에 피는데 꽃의 색은 자주색, 홍자색, 분홍색, 흰색 등으로 다양하다. 꽃잎의 주변으로는 흰 털이 나는데 털은 안쪽에는 없고 바깥쪽에만 있다. 열매는 긴 달걀모양이며 끝에 4cm 안팎의 암술대가 남아 있다. 그 이름은 흰털로 덮인 열매의 덩어리가 할머니의 흰머리 같기에 할미꽃이라고 부르나, 한국의 다른 지역에 자라는 할미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풀이다. 동강할미꽃은 미나리아재비과의 유독성 식물로 이를 잘 이용하여 뿌리는 지사제, 학질, 신경통 등에 쓰인다. 그러나 이제는 무척 귀한 식물로, 동강주변에만 있는 세계적 희귀종으로 철저히 보호해야할 귀한식물이다. 약성이 있어도 뽑으면 안되는 보호대상의 식물자원이다. 동강할미꽃은 꽃이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이고, 다른지역의 할미꽃은 해가 떠도 고개를 떨군 모습임이 가장 확실히 구분된다. 봄이오면 동강주변 햇볕이 잘드는 바위틈에 따스한 기운을 받고 화려한듯 수줍은듯 피어나, 봄꽃을 찾아 나선 사진작가들을 유혹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를 지나다 이름이 고운 백운암(白雲庵) 안내판을 만났다. 그런데 백운암은 이름처럼 흰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높디 높은 첩첩산중 깊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골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그마한 암자였다. 지금의 백운암은 그리 오래된 절은 아니지만, 이곳에 모셔진 철조여래좌불(쇠로 만든 앉아있는 부처님)은 고려때 조성된 것으로 최근 보물 제1527호로 지정된 부처님이다. 백운암에 모셔진 철조부처님은 본래 백운암 근처에 있었던 고려시대 큰 절 '억정사'에 모셔졌던 부처님으로 추정되는데, 억정사는 현재 백운암에서 4~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절이다. 지금은 억정사의 자취는 찾아보기 어렵고, 그 터로 추정되는 곳의 비탈면은 밭과 과수원으로 되어있으며, 몇 가구의 농가가 있는 볕 잘드는 시골 마을에 불과하다. 차를 몰아 백운암 이정표를 보고 먼 거리에서 바라다보면 언덕 위에 요즈음 보기 어려운 커다란 한옥비각이 있는데, 그 비각이 바로 고려시대 후기 억정사 대지국사의 탑비다. 대지국사가 고려시대 국사로 추앙받았던 스님이고 보면, 비석 뿐 아니라 그의 사리탑도 있었을 것이나 승탑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대야산 칠부능선 산줄기 위에는 거다란 거북바위가 자리잡은 곳에 작은 암자 석천암이 있다. 석천암(石泉庵)이란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생명수가 흘러넘치는 암자라는 뜻의 절 이름이지만, 본래는 보덕암이었다고 한다. 이 석천암에 오르려면 안내 팻말을 보고 삼송리 마을로 접어들어, 대야산 개울을 따라 좁은 산길로 2km 이상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한다. 비록 좁은 길이나 지금은 차 한대가 지나갈 수 있도록 포장이 되어있고, 가파른 길 중간 중간에는 자동차가 서로 비껴갈 수 있는 곳도 있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걸어서 오르면 매우 숨이 찰 것 같아 차로 오르다 보니 혹시 다른 차를 만날까 걱정되 되었지만 다행히 다른 차는 만나지 않았다. 석천암이 깃들어있는 대야산은 백두대간에서 뻗어온 산이 서쪽 내륙으로 돌아들어 속리산을 타고 내려온 산으로, 경북 문경시와 충북 괴산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대야산은 930m에 이르는 꽤 높은 산이다. 대야산에는 괴산쪽으로는 선유구곡, 화양구곡이 있고, 문경쪽으로는 용추계곡이 있고, 산에는 깎아지른 암봉과 기암괴석이 즐비하며, 계곡에는 폭포와 계곡이 많아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달사는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에 있던 절로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이 절은 신라 경덕왕23년(764)에 창건되었던 절로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달사의 창건은 한 석공이 불심으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런 고달사는 신라를 거쳐 고려 광종(재위949~975)때 왕실의 전폭적 지원으로 구산선문인 봉림산문을 대표하는 절로 크게 융성하였으나, 조선에 들어선 이래 억불정책으로 차츰 쇠약해지다가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불탔고 이후 폐사되고 말았다. 폐사가 된 뒤 고달사의 전각이 있던 곳은 논과 밭으로 변해 버렸고, 주춧돌과 기단석은 주변 집들의 주춧돌 담장 빨래판 등으로 변하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세월이 흘러 조선시대가 끝나고 일제강점기와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고달사는 묵묵히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1993년 고달사의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국가사적 제382호로 지정되고 1998년부터 문화재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고달사터에 남아있던 여러 석조물들이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되었다. 1993년 사적지로 지정되기 전에는 고달사터 전체가 논밭이었고, 국보 보물급 석조물도 논밭 속에 방치되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