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과학과 의학이 무척 발달하여 인간의 수명이 많이 길어졌지만,지금도 사람은 100년을 살기어려운 세상이다. 그런데상상조차하기 어려운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적어도 6,500만년 이전에는공룡들의 세상이 있었다. 지구의 나이가 45억년 정도 되었다고 하지만, 지구에 생명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지구가 태어난 후 40억년의 세월이 흐른 뒤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난 생명체가아주 작은 생명체로부터 서서히진화를 거듭하고 변화를 거듭하여 처음물속에서만 살던 생명들이육지로 나오고 미생물이 식물로 진화하고식물에서 동물로 진화하면서 다양한 생명체들이 나타나 수억년의고생대를 거치고 다시 수억년 후중생대에 이르러 공룡이 나타났다. 중생대는 지금으로부터 2억 3천만년전부터 6천 5백만년 전까지의 시기를 말하는데, 2억3천년 전부터1억 8천만년전 의 시기를 중생대의 처음시기인 트라이아스기라고 부른다.그 때 지구는 거대한 판게아가 분열하여 아프리카와 북미대륙이 나뉘어지기 시작하였고 기후는 초기에 따듯하다가 후기로 가면서 더워지고 건조한 기후로 변하였다. 이 시기에 지상의나무는 은행나무, 침엽수, 소철류 등이 나타나고초본류로는 포자식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임진년(1592년) 4월 14일 부산포에 침입한 왜적은 상주 충주를 거쳐 한양에 이른게 불과 18일 만이었다. 5월 2일 한양을 점령한 뒤 6월 13일에는 평양'까지 접수하고 전 조선국토는 살인과 방화로 초토화 되어 갔다. 그러나 이들의 전쟁물자는 왜군이 점령한 육로로는 너무 힘들어 해상으로 길을 내야 했다. 그리하여 해상으로 길을 내기 위하여 경상우수사인 원균을 공격하자, 원균은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에게 구원요청을 하였다. 이때는 4월 29일 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원균의 구원요청을 즉시 받아들여 5월 4일 축시에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거느리고 경상해안으로 출전하였다. 깜깜한 새벽에 출전하였으나 소비포 앞바다에 이르자 날이 저물었고, 5월 5일 당포 앞바다에 머물다 5월 6일에야 원균으로부터 왜적의 정세를 자세히 듣고 남해현령을 비롯한 경상도 전선 6척을 증편하고 거제 남단 송미포에서 밤을 지세웠다. 7일 아침 송미포를 출발하여 왜적이 머무르는 천성과 가덕도를 향하여 오시(午時=111~12시)에 옥포앞바다에 이르고 적의 동태를 살폈다. 이순신 장군은 적의 진영을 살피며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한 정부는 부산으로 임시수도를 정하고 행정조직을 이전하여 임시업무를 보았다. 그 임시수도정부청사를 보았던 곳이 이제는 동아대학교가 되었고, 그 임시수도정부청사로 쓰이던 건물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되었다. 이제는 겉모습만이 옛날 모습이고, 내부는 개조되어 대학교 행정업무를 보는 건물이 되었고, 2층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되어 고대 신석기시대부터 출도된 부산을 포함한 남해안 한민족의 출초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신석기시대부터 발굴과정에 출토된 유물 위주의 전시품들을 돌아보면서 많은 아쉬움도 있었다. 한민족의 기원이 적어도 5,000년은 된다고 하면서도, 그 5,000년 이전에는 어떤 나라가 있었는지 알수도 없고,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에 대하여는 별 설명도 없었다. 또 한민족의 활동영역은 본래 만주가 그 주 무대였는데, 신석기 청동기의 유물을 표기하면서도 정작 그 본류지역인 만주지역은 아예 지도에서 표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이는 스스로 만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역사학자들의 견해를 갖고 있음을 은연중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니 할 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이 비석은 부산 동래읍성 앞에 세워진 송상현을 비롯한 임진왜란에 전사한순국자들의 비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친 관군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동래부사 송상현을 비롯한 부산지역의 부사 첨사등은일본군과 첫 교전에서 싸우면 반드시 죽을 줄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싸우다 죽었다. 이들은 동래부사 송상현과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향교 교수 노개방, 유생 문덕겸 등이다. 이 제단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곧 세운 것이 아니라, 죽은지 150년이 지난 후 임진왜란으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사람들을후세들이 잊지 말게 하고자영조 18년 당시 동래부사 김석일이 세웠다. 이 단이 세워지기 전에는 동래읍성 남문밖 농주산에 송상현을 비롯한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분들을 모셔져 있었으나 김석일이 이곳에 송공단이 세워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송공단에는 여러분의 비석이 서있는데, 가운데 가장 큰 비석이 동래부사 송상현의 비석이고 좌우로는 당시 함께 순절한 관리들의 비석이 있으며, 그 앞쪽에비석들과는 별도로 한쪽 구석에 담장을 달리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함께 모셔져 있다. 송공단에는 해마다 음력 4월 15일 관에서 제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민족의 최대 전란인 임진왜란의 처음이자 최대 격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한 부산 동래 다대포 양산지역의 송상현 동래부사, 부산포 첨사 정발장군 다대포 첨사 윤흥신 등을 비롯하여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장렬히 싸우다승화한 많은 군관들과 민간인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모신 동래 충렬사를 찾았다. 태평세월을 보내고 있던 조선에 불어닥친 일본의 침략은 태평세월을 보낸 만큼이나 더욱 혹독하게 밀려왔다. 한민족 전란의 역사를 모두 뒤져 보아도, 이보다 더한 치욕과 상처는 없었을 것이며, 그 전란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임진왜란이 끝난 뒤 거의 300년 즈음에 조선은 다시금 일본의 침략으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슬픈 역사의 반복을 개탄해 마지 않을 수가 없다. 동래 충렬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현재의 왼쪽 기슭에 작은 사당형태로 있어왔으나, 이를 1978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확장하고 더욱 크게 성역화 하였다. 그 당시 대통령 이었던 박정희의 뜻이 반영되었으며, 선열들의 숭고한 뜻과 희생을 받들어이를 국란극복과 국론통일의 장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광복 71돌이 되었다. 근세 개화기에 정신차리지 못하고 지도자들이 국가와 민족보다는 자신들의 사리 사욕에 혈안이 되어 결국 일본에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후 35년을 살아오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올해로 그 71년째에 이른다. 그런데, 한민족의 나라가 없어질 뻔한 것은 최근세 100년 뿐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424년 전 일본은 일본 열도 내에서 패권을 잡기 위해 수백년 내전상태를 정리한 후,통일에 앞장섰던 장군들에 대한 보상으로 주기 위한 각종 잇권의 대상으로 조선을 선택하였다. 이들은 늘 글과 말로 싸우면서 논쟁만을 일삼는 조선 정부야 말로 너무 쉬운 싸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일으킨 임진왜란은 이곳 부산 동래에서 처음 교전이 이루어 졌다. 동래성 전투에서 동래부사 송상현과 정발장군은 훈련도 되지 못한 관군들과 동래 주민들을 모아 이곳 동래성에서 싸우다 무참히 전사하였다. 그 때 왜장은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키라고 말하자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고 답하고 중과부적인 상황에서도 싸우다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무너진 동래성은 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부산 기장군 바닷가에 있는 해광사는 동쪽으로 바다와 맞닿고 있다. 해광사 대웅전은 동향으로 앉아있고, 그 방향으로 100m만 나가보면 1년 내내 아침에 뜨는 해를 맞이할 수가 있는 바다가 있다. 검은 바위들로 둘러싸인 곳에는 작은 포구가 있고 하루 종일 어선들이 드나들며 생업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검은 화산암으로 둘러싸인 오랑대 앞에는 바다를 생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 안녕을 기원할 수 있도록 작은 용왕각이 세워졌고, 그 안에는 기장 앞바다를 지키는 용왕과 남녀 동자가 협시하는 모습의 용왕단이 있다. 새벽 동해 일출을 맞이하여 용왕단이 모셔진 오랑대에는 매일 용왕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위험한 바다를 삶의 바탕으로 삼는 사람들이 자연을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만 삼지 않고 삶을 유지케 하는 동반자와 경외의 대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새벽 해가 솟아오르자 잠에서 깨어난 갈매기와 오랑대 주변에 둥지를 틀고 사는 비둘기들도 군무를 하는 모습이 무더운 삼복중에도 삶의 환희를 느끼게 한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아파트가 주거문화의 대세를 차지하고 있는이 때 수 천년 동안 이어 오던 한민족의 주거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움직임이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가장 먼저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던서울의 북촌마을과 경복궁의 서쪽인 서촌마을 도심지역 오래된 한옥마을 되살리기에 큰 힘이 되었고, 서울 도심의 허름하던 옛 한옥들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주변 한옥들의 값이크게 올랐다. 그런 바람으로 오래된 한옥을 고쳐사는 대신새로운 한옥을 단지로 만들어 보자는 여망에서울의 외곽지역 새로운 주거단지를 한옥만으로 지을 수 있도록 계획한 은평한옥마을이 계획되었고, 지금 현대한옥으로 다양한 신한옥이 시도되고있다. 지방으로는 전주의 옛 전통이 그대로 남아있는 전주시내 한옥마을이 성공한 도심지 한옥마을 들이다. 이 외에 도시 근교에 넓은 땅에 전통한옥기와집을 이은 한옥마을 들이 여러곳에서 시도되고 있다. 바야흐로 한옥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요즈음 신한옥은 생활 양식의 변화에 따라 한옥의 건물 규모는 커지고 방의 크기도 커졌으며 방의 배치에 있어서도 옛날 한옥과는 차이가 많이 생겼다. 전체 집의모양은 기와를 이은 한옥이자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베그람지역에서 출도된 유물들이다. 베그람은 쿠샨왕조(기원전 1세기~ 기원후 3세기) 여름수도로 번성했던 도시인데, 베그람에 '카피시국'의 도읍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도시의 중심에 있었던궁궐터를 발굴하여 나온 다채로운 청동기, 유리, 석고, 상아장식 들이다. 각각의 유물들은 동서 제국들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당시 국제교역도시로 번성했던 베그람의 위상을 알 수 있게 한다..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불교의 전달 통로이기도 하였다. 기원 후 67년 경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중국으로 들어와 처음 불교를 전파했는데, 이들은 바로 인도의 서북부를 돌아서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지나서 중국땅으로 들어온 것이다. 당시에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이 인도의 불교를 받아들여 번성했다고 하며 대승불교가 꽃피웠고, 인도의 경전을중국의한문으로 번역을 주도 했던 스님들 또한 이 지역에서 왔던 스님들이었다. 수많은 경전번역승 중에 기원후 300년 경에 들어온 금강경의 역경승인 구라라집 또한 이곳 왕실 공주의 아들이었으며, 한국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해주었다는 마라난타 또한 이곳의 스님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아직도 내전이 끝나지 않은 탓에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계를 전전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황금유물들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황금유물들은 유럽, 북미, 호주, 그리고 아시아등 4대륙 11개국을 돌아 한국에는 12번째로 전시하게 된 귀한 유물들이다. 박물관의 순번으로 치면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은 19번째 기관이 된다. 찬란한 황금유물들의 제작된 연대로도 기원 전후이며, 그 섬세한 기법 또한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