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연변 김영자 작가] 엄마의 인생은 고생을 락으로 바꾼 인생이었고 자식들을 위하여 일체를 헌신한 인생이었다. 엄마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었다. 엄마는 생활의 강자였고 녀성으로서 자존, 자신, 자강을 지켜온 아름다운 인생이시다. 엄마는 94살에 자기의 인생을 마쳤는데 문명한 위생습관과 자아관리에 노력한 분이시다. 하기에 인생의 마지막까지 대소변 심부름시킨 적도 없었단다. 치아는 한대도 빠진 것이 없고 치아를 앓은 적도 없으며 머리도 절반 좀 넘게 희었을 뿐이다. 옛날 생활이 곤란하여 쌀뜨물에다 머리 감고 소금으로 칫솔질하셨는데 생활이 좋아진 후에도 이 방법이 좋다고 하시면서 늘 이 방법을 견지하셨단다. 아무리 좋은 치약을 사다 드려도 한 주일에 두 번가량 치약을 쓰곤 여전히 분염으로 칫솔질 하셨단다. 사실 고생하셨다 하여 인생수명이 짧은 것이 아니라 본다. 세상에 엄마처럼 고생한 녀자도 많지 않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수명은 정신적인 힘과 락관적 정신이 아주 중요하고 자아심리 조절이 아주 중요하며 사랑의 마음, 감사한 마음을 늘 지녀야 함을 깨우쳐 주더구나! 엄마는 어릴 때부터 자식교양을 잘해야 한다고 하셨단다. 우리가 어릴 때 엄마는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보골”이란 말은 이미 우리 주위에서 사라진 지 퍽 오랜 것 같다. 하나의 말도 사회발전과 더불어 더 널리 펴져 사용되는가 하면 또 어떤 말들은 차츰 저절로 소실되어 가고 있다. 이를테면 정치 술어들인 ‘대약진’, ‘인민공사’나 생활 술어들인 ‘방치돌(다듬잇돌)’, ‘대명대(홍두깨)’, ‘윤디(인두)’, ‘가대기(밭을 가는 기구의 하나)’, ‘곡괭이’ 등 수두룩한 가운데 “보골”도 어느덧 사라져 버렸구나! “보골”은 지금 “례물”로 대체 되어 쓰이고 있지만 사실 “보골”과 “례물”은 다른 점이 있단다. “보골”이란 곧 시집간 딸이 첫걸음으로(삼일에 오는 것이 아니란다.) 본가 친정집에 왔다가 다시 시집으로 돌아갈 때 딸한테 “사돈집에 보내는 첫인사”란다. 그것은 “떡보골” 이렇테면 찰떡보골, 증편*보골, 만두기*보골 등등 “떡보골”이 있는가 하면 그보다 더 인기 있고 고급스러운 “엿보골”이 있었단다. 지금 보면 별로 가치도 없고 우습게 보이지만 엄마네 그 시대엔 아주 고급이었다고 하는구나! 상상하여 보렴. 그때엔 사탕 구경만 하자고 해도 5-6리밖의 농촌공소합작사*에 가야 했단다. 물론 먹으려는 생각이야 못하였지. 혹여 한족 “홀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달비”란 곧 녀성의 자랑이고 풍도였다. 지금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바 황궁의 녀인들이 달비를 리용하여 멋스레 머리를 얹어 그 풍도를 보여주고 있다. 달비에 관한 전설은 많고도 많은데 전선에 나가는 남편이 겨울에 동상을 입게 하지 않으려고 녀인은 자기의 머리를 싹둑 잘라 길 떠나는 남편의 신발 안에 깔아 주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오늘까지도 길이 전해져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런데 이 세상을 소리 없이 울리신 나의 어머님의 이야기를 회억하면 나는 그만 눈앞이 흐려지고 목이 꺽 멘다. 나의 어머니는 보통 키에 걀쭉한 얼굴의 조선녀성이시다. 그리고 폭포수인 양 함치르르한(깨끗하고 윤이 반들반들 나는) 숱 많은 머릿결은 늘 자랑스럽기만 하였단다. 어머니는 특별히 머리를 잘 다듬는 아름다운 녀인이였다. 어머니는 녀성의 자랑 가운데 한가지가 머리라면서 늘 쌀 뜨물에 머리를 감고 잘 빗어 멋스레 얹거나 쪽지시었다. 숱 많은 머리는 기름을 바른 것처럼 함치르르 윤기가 돌아 마을 어머니들이 늘 흠상하는(우러러 감상하는) 아리따운 머릿결이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어머니는 달비가 그렇게 값이 간다는 소식을 접하였단다. 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