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비탈진 돌길로 높은 한산 나 홀로 올라가니(獨上寒山石逕斜) 흰 구름 피어나는 곳에 외딴 집 하나 있네(白雲生處有人家) 가던 길 멈추고 잠시 늦가을 단풍을 감상하니(定車坐愛楓林晩) 서릿발 단풍잎이 매화보다 붉구나(霜葉紅於二月花) 13살짜리 어린 소년은 당나라 두목(杜牧, 830~852)의 시를 줄줄 읊었다. 죽음에 앞서 이 시 한수로 목숨을 건진 소년의 이름은 여대남(余大男, 1580년~1659)이다. 여대남은 경상남도 하동 출신으로 보현암(普賢菴)에서 글공부를 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의 장수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에게 잡혀 죽을 뻔 하였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당시 여대남은 죽기 직전, 붓을 달라고 해서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를 달필로 써내려갔다. 이를 본 가토 기요마사는 이 소년의 비범함에 죽이려던 것을 중지하고 일본으로 데려가 자신의 스승인 일진(日眞) 스님에게 출가 시켜 승려의 길을 걷게 한다. 소년시절부터 영특했던 여대남은 일본 최고의 불교학당인 교토의 육조강원(六條講院)에서 공부 한 뒤 규엔지(久遠寺), 호린지(法輪寺) 등을 거쳐 1609년에 29살의 나이로 구마모토의 고찰인 혼묘지(本妙寺)의 3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막부시대(여기서는 에도시대‘1603~1868’를 말함)에는 막부의 엄격한 규제로 아무나 목화솜으로 옷을 해 입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겨울이 길고 추운 지방인 아오모리 사람들은 마를 심어 그것으로 옷을 해 입어야 했지요. 얼마나 추웠겠습니까? 겨울에 숭숭 바람이 들어오는 마옷을 입을 수 없게 되자 어머니들은 마옷감 위에 코긴사시(자수의 일종으로 보온을 위한 덧누비)를 해서 보온성을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 막부에서 목화솜은 사용못하게 했지만 목화실은 허용하여 집집마다 코긴사시 붐이 일었지요. 그렇게 가족 사랑의 마음이 듬뿍 담긴 코긴사시는 쓰가루지방의 독특한 무늬로 남아 오늘날 ‘쓰가루코긴사시’의 전통이 지켜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본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青森県 弘前市)에 사는 코긴사시의 명인 사토요우코 (佐藤陽子) 씨가 그의 자수전시관을 찾았을 때 들려준 이야기다. 전시관의 정식 이름은 <사토요우코코긴전시관(佐藤陽子こぎん展示館)>으로 이곳을 찾아간 날은 지난 8월 8일 오후 4시 무렵이었다. 히로사키시의 조용한 마을에 자리한 자수전시관은 2층짜리로 된 아담한 가정집 같은 곳이었는데 1층에는 견학자들을 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에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곳, 그런 곳이 있을까? 그런 곳이 있다. 아니 전기는 들어가는 데 전깃불을 거부하고 호롱불을 켜고 영업하는 곳이 있다. 호롱불이라고 한 것은 그런 분위기를 말하고자 함일 뿐 실은 램프불이다. 하지만 침침하기는 호롱불이나 램프불이나 매한가지다. 관서지방은 기온이 39도나 올라간다는 일기예보에도 아오니온천은 숙박 방에 솜이불이 놓여있다. 아오모리현(青森県) 아오니온천(青荷温泉)에 도착한 것은 지난 8월 11일 금요일 저녁 6시 무렵이었다. 구불구불 4킬로 이상의 편도 산길을 승용차로 달려 온천에 도착하니 슬슬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아오니온천은 전기로 대변되는 모든 문명의 이기가 작동되지 않는 곳이다. 텔레비전도 없고 물론 슬기전화(스마트폰)도 터지지 않는 곳이다. 대신 침침한 램프불이 방마다 걸려있고 현관이나 복도 역시 마찬가지다. 전날 크고 드넓은 아름다운 도와다호수(十和田湖)를 둘러보고 이 깊숙한 두메산골 온천에 도착했다. 산속이라 해가 매우 짧다. 6시부터 저녁 식사가 시작되는 대형 식당은 다다미방으로 되어 있고 유카타(浴衣, 목욕한 뒤에 입는 일본옷)를 갈아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식탁에 앉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코케시(일본의 전통 나무 인형)를 배웠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요즘 들어 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이곳 쓰가루 지역의 유명한 코케시(인형)작가 였습니다만 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나무인형을 만드는 것을 무관심하게 봐왔고 흥미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코케시 강사가 되어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고지마 리카(小島利夏) 씨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지난 8월 8일 오전 11시 기자는 아오모리에 있는 쓰가루전통공예관(津軽伝統工芸館)을 찾았다. 이곳에는 코케시 인형 박물관이 있었는데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크고 작은 나무 인형이 2층 박물관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고지마 리카 씨의 아버지이며, 코케시 인형 명장인 고지마 도시유키(小島俊幸1949~2012) 씨의 작품을 비롯하여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인형들은 모두 이름난 작가들이 만든 작품들이다. 오뚝이처럼 생긴 나무 인형에 눈, 코, 입과 머리를 그려 넣고 옷모양을 그려 넣으면 완성되는 코케시 인형은 <다카하시문서(高橋長蔵文書)>(1862)에 코우케시(木地人形)라는 표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대관절 땅이 얼마나 큰 겁니까?” 나는 요우코(陽子) 씨에게 물었다. “한 4천 평 정도될 거예요.” “네? 4천 평이요?” 요우코 씨 집은 아오모리현 고노헤(五の戸)의 주택가에서 좀 떨어진 숲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4천 평이나 되는 넓은 숲속에 달랑 요우코 씨 집 한 채뿐이었다. 집을 에워싼 숲 속에는 이름 모를 꽃 들이 활짝 폈다. 아! 정말 요우코 씨는 숲속의 요정 같았다. 미술관처럼 지어놓은 요우코 씨 집안에 들어서자 드넓은 숲 정원이 거실 통유리 너머 가득 펼쳐진다. 탄성을 지르며 소파에 앉자 그녀는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 따끈한 허브차를 내왔다. 여름이라지만 비가 내리는 아오모리는 마치 늦가을처럼 썰렁했는데 따스한 차가 제격이었다. “우리집 말인데요. 여긴 땅값이 싸요. 1평에 1만 원(한국돈) 정도랍니다.” 음... 그렇다면 4천 평이라면 4천만 원? 도쿄에 견줄 수 없는 싼 가격이다. 요우코 씨는 북적이는 도쿄의 삶을 정리하고 아오모리에 정착한지 10년째다. 드넓은 토지에 단독주택을 지어 정원에는 온갖 화초를 심고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는 모습이 일본인들의 “로망”을 이룬 것처럼 보였다. 이 부부는 가끔 도쿄에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양력이 일상생활의 기준이 되고 있는 일본에서는 명절도 양력으로 쇤다. 8월 15일은 일본의 한가위인 오봉(お盆)으로 지난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일본은 고향을 찾는 이들로 전국이 교통이 마비될 정도로 북적거렸다. 고향을 찾지 않는 사람들은 오봉기간을 이용해 산과 바다로 놀러가는 바람에 붐비는 도로는 더욱 붐빈다. 시즈오카현의 시모다(下田)는 인구 2만 5천 명 정도의 작은 도시다. 도쿄에서 승용차로 4시간 거리에 있는 시모다는 귀성객으로 붐비는 게 아니라 해수욕장이 있어 오봉 연휴를 이용해서 놀러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지난 12일부터 지인인 노리코 씨 집에 묵고 있는 글쓴이는 일본의 오봉 기간의 교통 정체를 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집 근처에 해수욕장이 있는 관계로 도쿄로 향하는 길이라는 길은 모두 막혀버려 생활필수품을 파는 슈퍼까지 차로 10분 거리 정도 걸리던 도로가 1시간 씩 걸릴 정도로 정체가 심하다. 지인인 노리코 씨는 올해 62살로 89살의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데 오봉이라고해서 특별히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고 오봉과 관련된 음식 같은 것도 만들어 먹지 않았다. 하지만 설날(양력 1월 1일, 오쇼가츠)에는 오세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디가 아픈 것일까? 중년 남자는 몸을 조아리고 연신 철불(鐵佛)을 씻어 주고 있었다. 도쿄 스가모 고간지(高岩寺)에는 병 치료에 영험한 철불(鐵佛)이 있는데 이 철불을 만지면 온갖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있어 특히 고령자들이 많이 찾아온다. 철불 이름은 도게누키지장(とげぬき地蔵, 바늘을 빼준 지장이라는 뜻)으로 옛날 한 무사의 시녀가 바늘을 삼켜 고생하다가 이 철불에 기도하여 바늘이 빠졌다는 뜻에서 유래한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떨어지는 중생이 한명이라도 있으면 성불을 못 한다는 보살로 한국의 경우 명부전(冥府殿)의 주존불로 믿고 있다. 명부전을 지장전이라고도 부르며 명부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이 있다고 해서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지장전에는 지장보살상을 중심에 모시고 좌우에 도명존자, 무독귀왕, 그 좌우에 시왕을 안치하고 앞에는 동자상ㆍ판관(判官)ㆍ녹사ㆍ장군(將軍) 따위를 갖춘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절에 따로 명부전이 없으며 고간지(高岩寺)처럼 지장보살상 만을 모시거나 자녀를 지켜주는 뜻으로 아기를 안고 있는(子安地蔵) 형태의 지장보살상을 모시는 곳도 있다. 관서지방에서는 지장봉(地蔵盆, 봉(盆)이란 한가위를 가리킴)이라고 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와세대대학 서점에서는 어떤 책들이 잘 팔리고 있을까? 점심 무렵에 서점 안에 들어섰으나 방학이라 그런지 찾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다. 서점 입구에는 등산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코너를 마련해 놓았는데 《시작하자 등산》, 《일본 백 명산 등산지도》 띠위등산 관련 책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다른 코너에는 일반 서점처럼 베스트셀러 책을 진열해 놓았는데 주간 랭킹을 문고판과 일반책으로 구분해서 순위를 3위까지 매겨 놓았다. 문고판 1위는 에도시대 시인인 마츠오바쇼의 ‘오쿠노호소미치(奥の細道)’ 2위는 스미노요루의 청춘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3위는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였다. 한편 일반 신간의 1위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입문’, 2위는 무로마치 시대의 내분을 그린 ‘관응의 요란(観応の擾乱)’ 3위는 ‘메뚜기를 쓰러뜨리러 아프리카로(バッタを倒しにアフリカへ) ’였다. 아무래도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서점이다 보니 시중의 베스트셀러와는 조금 다를 것이다. 특히 문고판 1위 자리에 마츠오바쇼 작품이 올라있는 것을 보면서 일본 대학생들이 고전을 외면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하이카이(俳諧, 5.7.5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같은 동양권이지만 일본은 한국과 달리 초복이니 중복이니 하는 복날이 없다. 따라서 복달임(복날에 그해의 더위를 물리치는 뜻으로 고기로 국을 끓여 먹음)도 없다. 대신 토용의 소날(土用の丑の日, 도요노 우시노히)이라고 해서 장어(우나기)를 즐겨 먹는다. “옛날에는 장어를 그렇게 쉽게 먹을 수 없었지요. 그러다 보니 무더위에 장어라도 먹고 힘내라는 뜻에서 장어를 먹는 풍습이 생긴 것은 아닐까요?” 다카라 아이코(73살)씨는 어제 7월 25일 ‘장어 먹는 날’에 대한 유래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렇게 답을 했다. 기자는 보름 일정으로 다카라 씨 집에 묵고 있는데 ‘장어 먹는 날’ 인 어제 특별히 저녁 식탁에 ‘장어(우나기)’가 올라오지는 않았다. 그것은 어쩜 복날이라고 해서 한국인의 식탁에 모두 삼계탕이 오르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일지 모른다. 특별히 장어를 먹게 된 유래에 대해 재미난 이야기는 에도시대(江戸時代、1603~1868)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더운 여름철에 장어가 하도 안 팔리자 장어집 주인이 당대 유명한 학자인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1728~1780)에게 어찌하면 장어를 만히 팔 수 있는지를 문의 했다고 한다. 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이는 의열투쟁으로 독립운동을 한 박열(1902~1974)이 쓴 시다. 박열은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은 인물로 요즘 인기리에 상영 중인 영화 ‘박열’의 주인공이다.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영화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독립운동가 박열보다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 文子, 1903~1926)가 더 돋보인다고 말이다. 후미코는 박열의 이 시에 반했다고 하지만 함께 무정부주의 사상을 공감하는 동지로서의 매력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연인으로 발전하지 않았나 싶다. 후미코는 1922년 봄부터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박열과 동거를 시작하며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우회를 결성한다. 경북 상주 출신인 박열은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할 당시 3ㆍ1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그해 10월 일본으로 건너간다. 박열은 1922년 4월 정태성 등 동지 16명과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