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도쿄 이윤옥 기자] “한국, 조선인 피폭자의 존재는 일제 식민지 지배 탓이며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을 맞은 것은 전쟁을 일으킨 천황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한 일제국주의의 전쟁범죄와 천황제를 용인한 일본인의 무자각과 무책임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와 데루다카(塙輝高, 도쿄 거주) “인터넷을 통해 고려박물관에서 피폭 관련 전시회를 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히로시마에 친구가 살고 있어서 조선인 원폭 피해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일본인으로 매우 부끄럽다.” -아리타 고타로(有田幸太郎, 시코쿠 거주)- 이는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피폭 71년 한국ㆍ조선인과 일본(被爆 71年 韓国·朝鮮人と日本)> 전시회장에서 만난 일본인들의 이야기다. 특히 아리타 씨는 멀리 시코쿠 지방에서 ‘피폭전시회’를 보기 위해 도쿄로 올라와 이날 고려박물관을 찾았다고 했다. 어제(21일) 오후 2시 기자는 신오쿠보에 있는 고려박물관을 찾았다. 고려박물관(관장 히구치 유우지)을 만든 사람들은 양심 있는 일본인들로 아베정권을 비롯한 극우 성향의 정치인들이 “침략전쟁은 없었다. 위안부의 강제성은 없다. 독도는 일본땅이다.”를 주장하는 것에 쐐기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민족의 최대 전란인 임진왜란의 처음이자 최대 격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한 부산 동래 다대포 양산지역의 송상현 동래부사, 부산포 첨사 정발장군 다대포 첨사 윤흥신 등을 비롯하여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장렬히 싸우다승화한 많은 군관들과 민간인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모신 동래 충렬사를 찾았다. 태평세월을 보내고 있던 조선에 불어닥친 일본의 침략은 태평세월을 보낸 만큼이나 더욱 혹독하게 밀려왔다. 한민족 전란의 역사를 모두 뒤져 보아도, 이보다 더한 치욕과 상처는 없었을 것이며, 그 전란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임진왜란이 끝난 뒤 거의 300년 즈음에 조선은 다시금 일본의 침략으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슬픈 역사의 반복을 개탄해 마지 않을 수가 없다. 동래 충렬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현재의 왼쪽 기슭에 작은 사당형태로 있어왔으나, 이를 1978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확장하고 더욱 크게 성역화 하였다. 그 당시 대통령 이었던 박정희의 뜻이 반영되었으며, 선열들의 숭고한 뜻과 희생을 받들어이를 국란극복과 국론통일의 장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염태영 수원시장이 지난 14일 수원시 올림픽공원(권선구 권선동)에 건립된 수원평화비(평화의 소녀상)를 찾아 위안부 피해자들을 추모했다. ‘제4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을 맞아 수원평화나비가 주관한 이번 기념행사에는 염 시장을 비롯해 수원시여성단체협의회, 수원시가족여성회관, 수원여성회, 임면수선생기념사업회 회원과 시민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한편 이날 경기지역 15개 지역 평화나비 연합인 ‘경기나비네트워크’가 창립해 위안부 문제의 체계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염 시장은 격려사에서 “강요된 화해는 위안부 피해자분들께 또 한 번의 상처를 주는 일”이라며 “일본 정부로부터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촉구해야 된다.”고 말했다. 행사를 주관한 수원평화나비는 필리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고 매주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수요집회에 참가하는 등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해마다 8월이면 일본이 한국을 유독 분노케하는 일이 있다. 어디 그게 8월 뿐의 일이겠느냐 싶지만 특히 8월을 꼬집어 말하는 것은 이때가 바로 일본의 패전일이 들어 있는 달로 전쟁범죄자들을 기리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노골화하고 있는 몰지각한 정치인들의 모습을 봐야하기 때문이다. 도쿄 한복판 치요다쿠(千代田区)에 있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는 일본인들의 주장대로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호국 영령을 모신 신사(神社)’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메이지유신 이래 근대 이후 일본이 관여한 전쟁에서 활약한 전쟁범죄자들을 미화하고 숭상하는 시설이다. 일본군이 한국인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면 모를까, 한국을 침략하고 그것도 모자라 침략국의 선량한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죽게한 일본을, 그 책임을 묻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지금 야스쿠니에 강제 합사(合祀) 되어 있는 니이야마만수(新山滿秀, 한국이름 박만수)도 그런 젊은이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곳에 합사된 박만수 씨는 전북 남원 출신으로 일본 구(舊) 해군 군속신상조사표에 따르면 남양군도에 강제 징용되어 1945년 4월 11일 ‘전사처리’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백두산하 삼천단부 한데 모여 한배님이 건국하신 우리나라 만세 높고 둥근 백두산은 우리 민족 기상이며 맑고 깊은 천지물은 우리겨레 정신일세 우랄산부터 대마도까지 수륙 수만리 우리 선조 즐기시던 보금자리 이 기상과 이 정신을 모두 합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후렴) ‘무궁화 화려한 금수강산 배달민족 배달나라 길이 보전하세“ 이 노래는 독립운동가인 희산(希山) 김승학(1881∼1964) 선생이 소장했던 새로운 애국가 전문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14일 일제강점기 독립군들이 부른 것으로 추정되는 ‘애국가(愛國歌)’를 발굴했다며 선생이 소장했던 가사 기록지를 공개했다. A4용지 절반 크기의 갱지에 적힌 이 애국가는 지금의 애국가처럼 4절에 후렴구로 돼있는데 “삼천단부(단군 자손의 무리)”, “한배(단군을 높여 부르는 말)” 같은 대종교에서 쓰던 낱말과 희산의 독립운동 경력으로 미뤄 대종교 계열 독립군들이 불렀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가사 3절이 “우랄산부터 대마도까지 수륙 수만리 우리 선조 즐기시던 보금자리”라고 된 것을 보면 고조선의 넓은 강역에 대한 인식이 뚜렷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지는 희산의 후손인 김병기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광복 71돌이 되었다. 근세 개화기에 정신차리지 못하고 지도자들이 국가와 민족보다는 자신들의 사리 사욕에 혈안이 되어 결국 일본에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후 35년을 살아오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올해로 그 71년째에 이른다. 그런데, 한민족의 나라가 없어질 뻔한 것은 최근세 100년 뿐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424년 전 일본은 일본 열도 내에서 패권을 잡기 위해 수백년 내전상태를 정리한 후,통일에 앞장섰던 장군들에 대한 보상으로 주기 위한 각종 잇권의 대상으로 조선을 선택하였다. 이들은 늘 글과 말로 싸우면서 논쟁만을 일삼는 조선 정부야 말로 너무 쉬운 싸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일으킨 임진왜란은 이곳 부산 동래에서 처음 교전이 이루어 졌다. 동래성 전투에서 동래부사 송상현과 정발장군은 훈련도 되지 못한 관군들과 동래 주민들을 모아 이곳 동래성에서 싸우다 무참히 전사하였다. 그 때 왜장은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키라고 말하자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고 답하고 중과부적인 상황에서도 싸우다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무너진 동래성은 임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오는 8월 14일은 4차 세계일본군‘위안부’ 기림일이다.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은,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공개 증언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고발한 날을 기억하고 그 용기와 투쟁을 기리기 위한 날로, 2012년 제11차 아시아연대회의에서 각국이 함께 결의하여 매년 세계연대행동의 날로 진행해 왔다. 광복 70돌이었던 지난해 막바지, 2015년 12월 28일 합의 이후 8개월이 지나는 동안 이 합의가 실패한 것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국민 여론은 물론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도 이 합의의 부당함을 이야기하며 재고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기어코 이 합의를 밀어붙이고 있고, 피해자들에게 다시 한 번 상처만 줄 뿐인 화해치유재단 설립을 강행하였다. “진정한 사죄와 그에 따른 배상이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낱 정부 간 정치의 도구로 전락시킨 졸속적 12.28 합의는 무효화되어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합의 무효와 공식 사죄, 법적 배상을 외치며 함께 행동하고 있다.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인천개항박물관 광복 71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만주 아리랑-조선족 디아스포라의 삶과 기억]은 그동안 사진작가 류은규가 모은 중국 조선족의 역사와 생활사 자료 중, 만주 지역의 민족해방운동과 함께 그 기반이 되어준 우리 이주민들의 삶을 살펴보고자 기획되었다. 1층은 이주와 항일운동에 관한 사진 자료를 정리하고, 조선족의 생활유물도 선보인다. 그간의 사진수집에 관해 류은규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념사진은 그 한 장으로는 별로 큰 의미를 가지지 않지만, 모아놓고 보면 시대를 비추는 역사자료가 된다. 지금 남은 사진도 언제 어떻게 소멸할지 모른다. 나는 사진가로서 본능으로 사진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모은 사진이 5만 여장이 되었다.” 고 말한다. 2층은 류은규 작가가 중국 동북 일대를 돌면서 항일지사 후손들을 찍은 인물사진전이다. 이에 대해 작가 류은규는 “역사의 증언자를 촬영하는 포트레이트 작업은 사진이 가지고 있는 기록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구현하는 작업이다. 특히 만주 지역의 항일운동가 유가족의 촬영은 90년대에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더는 찾지 못할 뻔 했다.”고 했다. 인천관동갤러리와 인천개항박물관 기획전시실에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어머니 품이여 드리워 베푼 사랑의 손길에 내 어엿이 자라 멍멍개 마루에서 낑낑 꿈꾸는 자정까지 일해도 고된줄 모르는 힘 그 따사로움 가슴에서 흘러나오다 - 조선족 시인 설인의 고향사람들 가운데 ‘나를 낳은 산천이여’ 일부- 그렇다. 조선족 시인은 입을 열면 고향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붓을 들면 그 고향산천이 먼저 종이에 내려앉는 정서를 태생적으로 지녔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조선족은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이자 좀 특별한 존재이다. 대부분의 소수민족은 그 지역의 토착민인데 견주어 조선족은 주로 19세기 말부터 고향을 떠나 국경을 넘어 정착한 사람들로 광복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서 인정을 받은 신참 소수민족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의 이주가 주로 일제강점기에 이뤄졌고, 조국의 분단으로 인해 돌아갈 곳을 잃었다는 점에서 볼 때 조선족의 이주와 정착의 과정엔 수많은 고통과 비애, 눈물과 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인천관동갤러리(관장 도다 이쿠코)에서 열리는 조선족을 주제로 하는 사진전은 사진가 류은규가 한중수교 후 얼마 되지 않은 1993년부터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 조선족을 촬영하고, 그들의 역사를 증명
[우리문화신문= 경북 상주 이윤옥 기자]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라. 한 말을 쓰는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주므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지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어리는 겨레라. 그러하므로 말은 겨레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겨레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겨레도 내리 나니라. 이러하므로 겨레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니, 이지러짐이 없고 자리를 반듯하게 잡아 굳게 선 뒤에야 그 말을 잘 지키나니라. 글은 또한 말을 닦는 기계니, 기계를 먼저 닦은 뒤에야 말이 닦아지나니라” 이 말은 힌힌샘 주시경 선생의 보중 친목회보 창간호 1910년 6월호 ‘한겨레 말 ’가운데 일부이다. 오늘은 평생 겨레말을 올곧게 사랑하고 실천하신 주시경 선생의 102주기 날이다. 이 날을 맞아 경북 상주의 마음닦기 수련원인 푸른누리(대표 최한실)에서는 아침 8시 조촐한 추도식이 있었다. 오늘 모임은 겨레말 살리는 이들의 ‘배달 겨레말 여름 모임’을 위한 전국 모임이다. *주시경 (1876.12.22~1914.7.27) 선생은? 국어학자로서 우리말의 정리와 보급에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