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극히 절제된 전통가무극 노가쿠(能樂)를 관람하고… 오-오-잇(합창소리) 타타타탁(북소리) 오-오-잇(합창소리) 타타타탁(북소리) “북잽이들의 북 치는 소리도 절도가 있지만 그들이 내는 소리 역시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 내는 소리처럼 획일적인데다가 질러내는 소리가 각이 져서 마치 사무라이들의 칼싸움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 말은 한국인들이 노가쿠(能樂)를 함께 보고 나오면서 내뱉은 첫마디이다. 나 역시 같은 느낌을 받았다. 출연자들의 바로 코앞에 앉아서인지 유달리 북잽이의 절도 있던 손놀림이 기억에 남는다.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키나 분라쿠(인형극) 등은 일본에서 여러 번 볼 기회가 있었지만 노가쿠 공연은 좀처럼 볼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얼마 전 서울 남산국악당에서 처음 보는 기회를 얻었다. 일본의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인 타츠미만지로(辰巳滿次郞) 씨 등 노가쿠시(能樂師) 일행의 한국공연 소식을 알려준 천안 순천향대학 교수인 후지타 선생은 나와 오랜 지인으로 순천향대학에서 노가쿠 특강을 마친 뒤 서울 남산국악당에서 공연이 있으니 함께 보자고 권유해와 보러 간 것이다. 노가쿠(能樂)는 1,000여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가무극으로 유네스코 세
사쿠라(벚꽃)가 온 나라에 지천이다. 그 꽃을 보고 즐기는 말이 한국에서도 보통명사화 된지 오래인데 이름하여 벚꽃(사쿠라)놀이이다. 일본에서는 사쿠라를 보고 즐기는 것을 하나미(花見)라고 한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꽃보기’이다. 하나미(花見) 속에 벚꽃이란 말이 들어가지 않지만 하나미라고 하면 봄철 벚꽃놀이를 가리킨다. 벚꽃이 나라꽃(가을에 피는 국화는 천황가의 문양)인 일본사람들은 이 꽃이 피길 기다려 색색의 하나미벤토(벚꽃놀이 도시락)을 싸들고 사쿠라 나무 밑으로 몰려든다. 삼삼오오 가족단위 또는 회사 동료끼리 모여 도시락을 나누고 맥주를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시간은 일본인의 연례행사 중 으뜸으로 꼽힌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꽃놀이 풍습은 나라시대(710-794)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귀족들의 꽃놀이 행사였는데 당시에는 주로 매화꽃놀이였다가 헤이안시대(794-1192)에는 서서히 벚꽃으로 바뀐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최고가집(最古歌集)인 만엽집(万葉集)에 벚꽃을 읊은 노래가 40수 (매화는 100수)나오다가 헤이안시대의 작품인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에서는 이 숫자가 역전된다. 따라서 헤이안시대부터 하나미(花見)란 거의 벚꽃을 가리키는 것으로
“금은도 번쩍이는 보석조차도 귀한 자식에 이르겠는가” -銀も金も玉も何せむに勝れる子に及かめやも,(万葉集 ⑤-803)- 후쿠오카현 남부 인구 4만여 명의 조용한 도시 가마시(嘉麻市) 누리집에는 만엽시인 산상억량(山上憶良, 660-733, 야마노위에노오쿠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랑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에 편찬된 만엽집万葉集, 만요슈은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문학이다. 천황으로부터 이름 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읊은 노래가 20권에 4516수(首) 실려 있다. 치쿠호(筑豊, 지방이름)에도 그가 지은 수십 수의 노래가 전한다. 고대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던 치쿠호는 다자이후정청(太宰府政廳)이 있던 곳으로 세토내해 물길을 타고 바로 수도(나라 ‘奈良’)로 연결되던 곳이다. 당시 관내의 지방군수로 부임한 산상억량은 특히 빈궁문답가(貧窮問答歌)로 유명한 시인이다. 귀족이면서 항상 가난한 사람의 위치에 서서 그들의 슬픔을 노래하여 그들을 높은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산상억량이 백제출신이라는 점은 밝히지 않고 있다. 아니 밝히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공산이 크다.
야마구치현 하기시(山口縣 萩市) 를 찾은 것은 죠카마치(城下町)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죠카마치란 일본국어사전에서 “전국시대로부터 에도시대에 걸쳐 다이묘(大名)의 거성(居城)을 중심으로 한 도시”라고 풀이하고 있지만 쉽게 말해서 오래된 일본 전통가옥을 구경 할 수 있어 고건축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찾았던 것이다. 이러한 죠카마치는 하기시 말고도 성주(城主)가 살던 곳은 어디에나 있으며 지금은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지방정부에서도 이들 고건축물을 복원하고 당시의 거리를 그대로 재현하는 등 관심이 많다. 무사 시절에는 북적였는지 모르겠지만 인구 5만의 하기시는 조용하다 못해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의 도시처럼 고요했다. 하기시내를 전망 할 수 있는 지월산 등산로에서 만난 노년의 아저씨는 천년고도 교토가 찾아드는 관광객으로 번잡해졌다면서 더 조용한 곳을 찾아 하기시로 이사 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전통 냄새가 물씬 풍기면서도 번잡스럽지 않은 곳이 하기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곳 전통가옥을 살피다가 뜻밖에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으니 그 이름은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였다. 일행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토기념관과 고택에 이르는 곳에는 이토의 밀랍인
사가성혼마루역사관(佐賀城本丸歷史館)을 찾아가던 날은 볼을 스치는 2월의 바람이 아직 쌀쌀했다. 후쿠오카 옆 도시 사가현은 일본열도의 남쪽 지방이라고는 해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조용한 중소도시의 한적함이 한눈에 느껴지는 사가 시내는 자동차들의 속도도 느리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그다지 바쁘지 않다. 사무라이 시절 성주가 살던 사가성(佐賀城)은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조선시대 원님이 살던 곳에 해당하는 곳이다. 지금은 새로 말끔하게 단장하여 역사자료관으로 쓰는 사가성의 본관 건물 안에는 때마침 꽃꽂이 전시회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일본에서는 사철 꽃꽂이 전시회가 열리지만 특히 1월과 2월에는 신년 축하 의식으로 이르는 곳마다 꽃꽂이 전시회가 한창이다. 흔히 이케바나(いけばな, 生け花、活花、揷花)라고 불리는 일본의 꽃꽂이는 다른 말로는 카도(かどう,華道, 花道)라고 한다. 일본말로 ‘카도(華道)’라고 부를 때에는 꽃꽂이보다는 넓은 범위로 ‘구도(求道)’의 냄새를 풍긴다. 이케바나에는 여러 유파(流派)가 있으며 양식이나 기법 따위가 유파별로 각양각색이다. 일본 이케바나의 유래는 불교에서 꽃을 바치는 공화(供花)에서 그 기
*2011년 11월 9일부터 수원일보에서, 2012년03월07일부터는 제주해피코리아뉴스에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국내외로 뛰어 다니며 그동안 사회에서 조명 받지 못한 여성독립운동가를 찾아내어 한분 한분께 드리는 '헌시'를 짓고 이분들의 일생을 요약하여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라는 책으로 엮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남성 독립운동가들은 12,000여명이 훈포장을 받았지만 여성들은 200여명 밖에 훈포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200여명의 이름조차 모르는 게 한국의 현실입니다. 여성 독립운동가하면 '유관순열사' 외에는 더 이상 모르는 우리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변에 널리 소개하여 이분들의 헌신적인 삶을 기억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저의 작업은 200여명을 모두 알리는 그날까지 이어 갈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청주에 사시는 분이 여성독립운동가의 자료를 보내 오셨습니다. 여러분들께서 가지고 있는 자료가 있으면 제게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분들은 저를 불러 주십시오. 서간도의 북풍한설 속에서 오로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일생을 건 이분들의 삶을이해하고 고난극복의 숭고한 정신을 함께 나누
조선의 3대 통감이자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寺內正毅,1852-1919)는 동양 3국의 고문헌 18,000여 점을 끌어모아 고향인 야마구치에 가져갔다. 그가 죽자 아들 수일(壽一)이 그 장서를 모아 1922년 고향인 야마구치시에 데라우치문고를 설립하게 된다. 부자로 이어지는 문화재 약탈의 전승이다. 데라우치가 조선관련 문화재를 끌어모으기 시작한 것은 조선총독 취임 때부터이다. 그의 곁에는 책 전문가인 고도소헤이(工藤壯平,1880-1957)가 항상 곁에 있었는데 데라우치는 그를 조선총독부 내대신비서관(內大臣秘書官) 등의 자리를 주어 고서묵적(古書墨蹟)을 조사한다는 핑계로 규장각 등의 고문헌을 마음대로 주무르게 했다. 군인 출신의 무식한 데라우치를 도와 고도소헤이는 값나가는 유구한 고서들을 데라우치 손에 넘겨주었다. 지금 야마구치현립대학 도서관에 있는 데라우치문고 (1957년에 데라우치문고는 야마구치현립여자단기대학에 기증했다가 현재는 야마구치현립대학 부속도서관 소속으로 바뀌었다)는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양심 있는 일본시민들이 만든 동경의 고려박물관에서 펴낸
이외수 선생의 ‘닭도리탕=토박이말’에 한 표 [진단] 닭도리탕 어원도 모르는 한심한 국립국어원과 조선일보 이윤옥 최근 소설가 이외수 선생이 트위터에 “닭도리탕은 일본식 이름이 아니다.”라는 글을 올려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해 국립국어원도 트위터를 통해 “닭도리탕의 도리는 일본어 'とり(새)에서 온 것으로 보고, 이를 닭볶음탕으로 다듬었다. 도리의 어원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분명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고 밝혀 일부 언론에서는 이외수 선생이 망신당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일본말찌꺼기를 연구해온 필자는 이를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다음에 두 가지 쟁점으로 살펴 나눠본다. 쟁점(1) 이외수 선생이 주장하는 ‘도리=토박이말’에 대하여... 작가 이외수 선생은 일본말 도리(tori,とり)를 새(또는 닭 ‘니와도리지만 도리라고도 함')로 보지 않고 우리 토박이말로 보는 근거로 닭을 ‘도려내어(토막 쳐) 만든 요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이 틀렸다기보다 이 말의 근거를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알다시피 닭도리탕을 만들려면 닭을 토막 내야 함은 상식이다. 통째로 인삼을 넣고 고아 먹는다면 삼계탕으로 간단히
조선일보는 구로다 망언 부추기지 말라 [논단] ‘오뎅’을 어묵으로 부르는 것이 어찌 ‘언어 내셔날리즘’인가 이윤옥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구로다 가츠히로(黑田勝弘, 71) 씨의 조선닷컴 글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어 붓을 들었다. 조선닷컴(인터넷판 조선일보)에 소개된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는 “한국의 애국자들은 오뎅이라는 일본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오뎅을 어묵꼬치로 바꿔 부르고, 일부 포장마차에서도 메뉴판에 그렇게 쓰고 있다.”며 상대가 일본이 되면 한국은 언어 내셔널리즘으로 고생한다고 했다. 이어 “와사비는 고추냉이로, 낫토는 생청국장이라고 바꿔 말해야 한다며 일본어를 거부하는데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게 까다로운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 먹을거리에까지 일본을 트집 잡는 사람은 이제 옛날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이 담긴 글을 인용하여 “조선닷컴 토론장 2012-02-17”에는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이러한 구로다 씨의 말은 일본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말이라고 제쳐 놓겠지만 그가 주장하는 ‘언어 내셔널리즘’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구로다 씨의 한국인 추종자들을 위해 두 가지만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 (1) 올해로 기미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93돌이다. 그 뜨거운 함성으로부터 약 100년 가까운 세월에 이르고 있지만 한일관계는 매끄럽지 못하고 찜찜하기만 하다. 오만한 식민역사의 반성은커녕 일본이 한국땅 독도에 품은 검은 야욕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래 가지고야 어찌 사이좋은 ‘이웃’임을 말할 수 있으랴! 지지난 주에 이어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를 통해 일제강점기 조선문화재 약탈이야기를 모두 4회에 걸쳐 실어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오만의 역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日本にある朝鮮文化財) (3) -고려불화의 90%는 일본에 있다- “한국인들이 가장 간절하게 반환을 원하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천리대학(天理大學)에 있다. 또한, 13~14세기 고려불화는 90%가 일본에 있다.” 위 이야기는 양심 있는 시민들이 만든 동경의 고려박물관에서 펴낸 유실된 조선 문화 유산 -식민지 하에서의 문화재 약탈, 유출, 반환·공개 책 20쪽에 나와 있는 말이다. 이 책에는 구체적으로 약탈된 조선의 문화재 행방을 소개하고 있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문화재는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