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조선땅에서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대한 글을 읽다가 한마디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건이 있어 이번 주 일본이야기 소재로 삼아본다. 때는 1927년 6월 26일, 강원도 철원읍 중리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6월이면 검붉은 오디(뽕)가 한참 맛있는 계절인데 8살짜리 오순덕과 동무는 오디 밭 옆을 지나다 탐스런 오디를 보고는 그만 먹고싶은 마음에 오디 몇 개를 따먹었다. 문제는 이 오디 밭주인이 일본인이었던 것이다. 운 나쁘게도 마침 그 시각 오디밭주인 후지사와(藤澤暢太郞)는 오디밭 쪽으로 걸어가다가 순덕과 그 친구를 발견했다. 놀란 아이들이 도망치자 후지사와는 쫓아가 순덕을 잡아서 넓적다리 살을 도려내는 악행을 저질렀다. 철없는 아이가 오디 몇 개 따먹었다고 살을 도려낸 이 극악한 사건이 바로 ‘철원사형사건(鐵原私刑事件)’이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순덕이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오자 부모는 기겁하여 경찰서로 달려가 신고했다. 그러자 철원경찰서에서 순사 2명과 협성의원 의사가 순덕이네 집으로 와서 상처를 조사했다. 결론은 후지사와가 나뭇가지 치는 전정가위로 순덕의 살점을 베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재는 게 편’이라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민속음악의 명인으로, 즉흥음악의 대가로, 명성을 날렸던 심상건과 그의 딸 심태진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함께 미국 순회공연을 한 바 있고, 1965년에는 심상건이 신병치료차 미국에 갔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떴었며, 그의 묘비에는 가야금이 조각되어 있다는 이야기, 심상건의 숙부, 심정순의 소리제는 그의 막내딸 심화영에게 이어졌는데, 이 소리는 과거 서울 경기지방과 충청도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제(古制)의 한 유형이며 김창룡 가문과 이동백, 심정순을 위시한 심씨 가문 등에서 이어졌다는 점, 등을 이야기하였다. 아버지 심정순으로부터 중고제 소리를 이어받은 심화영은 소리보다는 춤에 더 재능을 보여서인가, 특히 승무(僧舞)를 잘 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승무는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이 된 바 있고, 그 종목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다가 얼마 전에 타계하였다. 현재 이 종목은 심화영의 손녀딸 이애리가 전수조교로 활동하며 동 종목을 보존하고 있다. 심화영의 승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 주에는 중고제 판소리를 지켜 온 심정순(沈正淳)을 소개해 보도록 한다. 심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둘째 우수(雨水)입니다. 우수라는 말은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말이어서 이제 추운 겨울이 가고 드디어 봄을 맞게 된 것이지요. “우수 뒤에 얼음같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슬슬 녹아 없어짐을 이르는 뜻으로 우수의 성격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이 무렵에 꽃샘추위가 잠시 기승을 부리지만 “우수 경칩에 대동강도 풀린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우수와 경칩을 지나면 아무리 춥던 날씨도 누그러져 봄기운이 돌고 초목이 싹트지요. "꽃샘잎샘 추위에 반늙은이(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계절에 나누는 전래의 인사에도 "꽃샘잎샘에 집안이 두루 안녕하십니까?"라는 것도 있지요. 이 꽃샘추위를 한자말로는 꽃 피는 것을 샘하여 아양을 피운다는 뜻을 담은 말로 화투연(花妬姸)이라 합니다. 하지만, 우수가 되면 봄기운이 서리기 시작하는데 풀과 나무가 깨어나는 모습이 엿보입니다. 이때는 논밭을 둘러보고 새해 농사 계획 세우며, 삽질 한 번, 낫질 한 번으로 몸을 풀지요. 특히 이 무렵에는 농사일 한발 앞서 장을 담가야 합니다. 장 담그는 일은 시골 살림에서 매우 중요한 일인데 이웃과 장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이야기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에 ‘조선고적연구회(朝鮮古蹟硏究會)’라는 단체가 있었다. ‘조선고적연구회’는 조선총독부의 행정지원과 일본의 재벌, 궁내부, 일본학술진흥원, 이왕가 등의 재정지원으로 활동하던 식민사학의 뿌리가 되는 조직이다. 1910년대 이 조직이 등장하기 전에 생긴 조선총독부 주도로 실행하던 고적조사사업이 조선내의 문화재 단순한 파악 수준이었다면 조선고적연구회는 각 지역에 해당 유적의 전문가를 상주시키면서 기존에 파악된 유적이나 유물이 발굴을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파헤치는 조직이라는 점이 다르다. 《청구학보(靑丘學叢), 5호(1931)》에 따르면 구로이타 가츠미(黑板勝美)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조선고적연구회는 고분(古墳) 발굴에 주력한 조직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히 학술적인 목적으로만 고분 발굴을 했을까? 도쿄 국립박물관 3층에는 “오구라 컬렉션(小倉 Collection)”이 기증한 우리나라 유물들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오구라는 1922년부터 1952년까지 조선에서 문화재를 약탈해갔는데 무려 1,100여 점이나 되며, 이 가운데 39점은 일본 국가문화재로 지정될 정도의 수준 높은 문화재들이다. 그런가 하면 앞 이름이 비슷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미국에 살고 있는 심상건 명인의 넷째 딸, 심태진이 현재 99살의 노인임에도 6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배운 가야금산조와 병창, 단가를 부르고 있다는 이야기, 아버지의 지도방법은 1:1 개인지도로 매우 엄격하였으며 제대로 못 하면 대나무로 어깨를 맞았다는 이야기, 한성준에게 춤을 배웠다는 이야기, 아버지의 산조는 즉흥적이어서 오르지 한성준이 그 장단을 맞출 수 있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심상건은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민속음악, 특히 가야금산조와 병창, 기악의 명인으로 무대나 방송, 음반제작 등 다양한 활동을 하던, 그러나 주권을 잃었던 불행의 시대를 보낸 국악인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변화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즉흥음악의 대가였다. 그는 산조를 탈 때마다 매번 달라서 배우는 사람들이 제대로 배울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가리켜 선생 없이 자학(自學), 자득했기에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심상건은 해방 직후, 조택원 무용단의 일원으로 넷째 딸, 심태진과 함께 미국의 원정공연을 성공리에 마쳤고, 귀국해서도 그의 공연활동이나 방송활동은 더욱 활발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에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만일 당신이 전염병 환자와 함께 대형 크루즈선박에 타고 있다면 어떤 심정이 들 것인가? 크루즈선박은 외부와 단절되어 있고, 당신은 선박 객실에서 기약 없는 격리생활을 해야 한다면?....” 사실 이런 상황이라면 정말 아찔할 것 같다. 공포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실제 일어났다. 지금 일본 요코하마에 정박 중인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의 상황이 그렇다. 지난 2월 10일, 크루즈선박에 격리되어 있던 한 일본인 남성은 선상에서의 격리생활에 대한 문제점을 조목조목 써서 세상에 내보였다. 다음이 그 요구사항이다. 1. 시트 교환, 실내청소가 거의 1주일 정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선내 생활 환경이 급속하게 나빠지고 있어 급속한 대응이 요구된다. 현재 생활환경 배려는 사실상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2. 격리 생활이 장기화함에 따라 승객의 건강악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의료 지원이 거의 안 되고 있으며 그나마 지원되고 있는 부분도 불충분하다. 무엇보다도 건강대책을 세워주고 의료전문가, 간호사, 보건원 등을 파견해달라. 3. 연일 새로운 감염자의 보도를 지켜보면서 승객에 대한 정보 제공이 극히 불충분하여 불안이 가속화되고 있다. 선내 방송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판소리 중고제와 심상건의 가야금 산조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중고제 판소리는 경드름이나 설렁제의 가락이 많으며, 평탄한 선율과 장단변화에 따른 극(劇)적인 표현보다는 단조로운 구성이 특징인데, 이러한 판소리 중고제의 특징이 심상건 가야금 산조에도 나타나는 것은 숙부인 심정순의 중고제 판소리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지난주에 이어 심상건의 가야금 산조와 중고제 판소리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한다. 현재, 심상건 류 가야금 산조를 연주할 수 있는 40대 이상의 중견연주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충남 도청이나 문화재단, 서산문화원 등에서는 기회가 닿는 대로 <심상건류 가야금 산조 감상회>를 기획하여 지역민들에게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그 까닭은 서산 출신 심씨 일가의 활동이나 중고제의 이해 및 재발견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서산>이라는 지역이 배출해 낸 심상건 명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게 되며, 음악적 자긍심을 느낄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중고제 판소리의 특징을 이어받은 심상건의 가야금 산조는 남도제의 산조 음악과 또 다른 음악적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전승의 가치는 충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우리 겨레 또 하나의 명절 정월대보름입니다. 정월대보름엔 초저녁 뒷동산에 올라가서 달맞이를 하는데, 떠오르는 달의 모양, 크기, 출렁거림, 높낮이 등으로 한해 농사를 점치기도 했습니다. 또 대보름날 밤 달집태우기도 하는데, 짚이나 솔가지 등을 모아 언덕이나 산 위에 쌓아 놓은 다음 소원을 쓴 종이를 매달고,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불을 지릅니다. 피어오르는 연기와 더불어 달맞이를 하고, 쥐불놀이와 더불어 이웃마을과 횃불싸움을 하기도 하지요. 정월 대보름의 세시풍속 가운데 ‘월견상극(月犬相剋)’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이는 달과 개는 상극이란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정월 대보름날에 개에게 온종일 밥을 주지 않거나 혹은 저녁밥 한 끼만 주지 않습니다. 개에게 밥을 먹이면 달의 정기를 먹게 되는 것으로 생각했지요. 여자의 본질인 음력의 에너지원은 달이어서 개에게 밥을 주는 여자는 개에게 자기의 음력을 도둑질시키는 것으로 본 때문입니다. 월식도 옛사람들은 개가 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요. 또 다른 대보름 풍속으로 “개보름쇠기”도 있습니다. 조선 후기 유득공(柳得恭)[1749~1807]이 펴낸 《경도잡지(京都雜志)》에,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정월대보름 풍속으로 풍년을 기원하는 ‘지신밟기’가 있는데, 지신밟기는 설날부터 대보름 무렵에 마을의 풍물패가 집집이 돌며 흥겹게 놀아주고, 복을 빌어 줍니다. 곳에 따라서 마당밟기, 귀신이 나오지 못하도록 밟는 매귀(埋鬼), 동네에서 쓸 공동경비를 여러 사람이 다니면서 풍물을 치고 재주를 부리며 돈이나 곡식을 구하는 걸립(乞粒)이라고도 합니다. 또 정월대보름 풍속으로 ‘볏가릿대 세우기’, ‘복토 훔치기’, ‘용알 뜨기’ 따위도 있습니다. 먼저 볏가릿대 세우기는 보름 전날 짚을 묶어서 깃대 모양으로 만들고 그 안에 벼, 기장, 피, 조의 이삭을 넣어 싸고, 목화도 장대 끝에 매달아 이를 집 곁에 세워 풍년을 기원하는 풍속입니다. 또 복토 훔치기는 부잣집의 흙을 몰래 훔쳐다 자기 집의 부뚜막에 발라 복을 기원하는 것이고, 용알 뜨기는 대보름날 새벽에 제일 먼저 우물물을 길어와 풍년과 운수대통하기를 기원하는 풍속이지요. 그밖에 대보름날은 점치는 풍속이 많습니다. 이 가운데 사발점은 대보름날 밤에 사발에 재를 담고, 그 위에 여러 가지 곡식의 씨앗을 담아 지붕 위에 올려놓은 다음, 이튿날 아침 씨앗들이 남아 있으면 풍년이 되고, 날아갔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는 8일 토요일은 우리 겨레의 명절 정월대보름입니다. 이날 하늘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르지요. 조선 후기 문신 홍석모가 연중행사와 풍속들을 정리하고 설명한 풍속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보면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하는 것을 ‘망월(望月)’ 곧 달마중이라 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에게 행운이 온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뒷동산에 올라 떠오르는 보름달을 맞이하는 것이 정월대보름에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보름날 아침 일찍 일어나면 '부럼 깬다' 하여 밤, 호두, 땅콩, 잣, 은행 등 견과류를 깨물며 한해 열두 달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도록 빕니다. 또 부럼을 깨물 때 나는 소리에 잡귀가 달아나고 이빨에 자극을 주어 건강해진다고 생각했지요. 또 아침 일찍 일어나 사람을 보면 상대방 이름을 부르는데 이때 상대방이 대답하면 '내 더위 사가라!'고 하는데, 이름을 불린 사람이 그걸 알면 “먼저 더위!”를 외칩니다. 이렇게 더위를 팔면 그해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재미난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 대보름날엔 세 집 이상의 성이 다른 사람 집의 밥을 먹어야 그해 운이 좋다고 하며, 평상시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