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난번 우리는 1898년 어느날 백정 박성춘(1862-?)이 종로에서 열린 대규모 민중 대회에서 개막연설을 하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박성춘은 당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요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우선 당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는 박성춘 말고도 상인 등의 하층계급이 요인으로 활동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백정 출신(해방된 백정)으로서는 박성춘이 거의 유일한 요인이었던 것 같다. 당시 활동을 주도한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서재필ㆍ윤치호ㆍ이상재ㆍ지석영ㆍ주시경ㆍ오세창ㆍ이승만ㆍ안창호ㆍ이승훈ㆍ남궁억ㆍ정교ㆍ이준ㆍ장지연ㆍ박은식ㆍ이동녕ㆍ신채호ㆍ한규설ㆍ이동휘 등이다. 당시 제도적으로는 신분제도가 철폐되었지만, 실제에 있어선 백정이 교육받거나 사회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박성춘은 어떻게 쟁쟁한 명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 아들 박서양의 효성이 촉매가 되었다. 교육을 받지 못한 박성춘은 아들에게만큼은 저주스러운 운명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천지 어떤 학교가 백정의 자식을 받아 줄 것인가? 번민에 번민을 거듭한다. 정규 학교는 보낼 수 없으므로 당시 천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98년 10월 29일 가을빛이 완연한 종로 거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양반과 천민, 선생과 학생, 양가 부인과 기생, 선비와 승려, 갓바치, 백정 등등 금방 수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다. 앞에 단상이 놓여있다. 행사 사회를 보는 독립협회 인사가 연설자를 소개한다. 그 순간 군중들 사이에 일순간 침묵이 흐른다. 이내 ‘우와…’ 함성이 터진다. 첫 연설자로 소개된 사람, 그는 뜻밖에도 박성춘이라는 백정이 아닌가. 박성춘이 뚜벅뚜벅 단상으로 걸어가 열변을 토한다. “이 사람은 대한에서 가장 천하고 무지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충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나라와 인민을 이롭게 하는 길은 관과 민이 합심하여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저 차일(遮日: 햇볕가리개)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역부족이지만 많은 장대를 합하여 받치면 그 힘이 매우 공고해집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관과 민이 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만만 년 이어지도록 합시다.” 청중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리고 박수가 터진다. 사회 저명인사가 아닌 천민 중의 천민인 백정이 만민 앞에 우뚝 선 것 자체가 뇌성벽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