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어진 음악으로 세상을 교화(敎化)한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 정농악회(正農樂會)라는 점, 원로들을 모시고 창립연주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재확인한 내용들이 훗날 후진 양성에 큰 경험과 교훈이 되었다는 점도 이야기하였다. 지금도 초심자를 비롯해, 젊은 국악인들은 쉽고 간단하게 생각하고 있는 음악이 바로 <정악(正樂)>이며, 대표적인 악곡이 ‘영산회상-靈山會相)’이라 생각하고 있겠지만, 평생을 걸고 연주해 온 원로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정농악회 창립 발표회를 함께 준비하면서 ‘영산회상’이란 음악을 바라보는 그분들의 시선이나, 음악적 태도가 어떠했는가, 하는 점은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로, 영산회상이란 어떤 음악인가? 이 악곡은 《대악후보(大樂後譜)》에 「영산회상불보살」 7글자를 노래하던 성악곡이었으나, 그 이후로 내려오며 가사를 잃고 기악곡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 곡은 편성 악기에 따라 각각의 이름이 다르다. 현악기들이 중심이 되면 ‘현악영산회상’이 되는데, 현악기 가운데서도 거문고가 중심이 된다고 해서 ‘거문고회상’으로도 불린다. 이에 견줘 관악기를 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정농악회>가 만들어지던 1970년대 중반, 당시에는 순수하게 공부하는 목적으로 서울음대 김정자(가야금 전임), 김선한(거문고 강사), 글쓴이(서한범, 피리 강사), 양연섭(가야금, 양금) 등 젊은 강사들이 ‘원로 사범에게 재교육을 받아 후진들을 지도하자’라는 취지로 조직되었으며 정농의 취지는 바른 음악, 또는 어진 음악을 지어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취지”였다고 이야기하였다. 정농악회(正農樂會)란 이름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어진 음악이란, 천지의 중화(中和)를 근본으로 한 것이기에 아정(雅正)하고 사(邪)하지 않다. 그러므로 방탕에 흐르지 않고, 어지러움에 이르지 않게 되어 동성상응(同聲相應)과 동기상감(同氣相感), 그리고 동친상애(同親相愛)하여 민족을 화합케 만든다.” <아래 줄임> 당시의 상황도 지금과 비슷했다. 일반 대중들은 물론, 국악 전공자들도 산조(散調)와 같은 민속악(民俗樂)에 견주어 정악(正樂)과 같은 음악들은 재미가 없는 음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공부 모임의 이름도 짓고, 원로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특별 지도도 받아 가며 정악의 기초를 다시 공부한 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심소 선생과 교분을 나누었던 지인 및 제자들의 추억담 가운데서 구희서, 김매자, 김은희 등이 보내온 내용 일부를 소개하였다. 구희서의 글에서는 “무보(舞譜)에 의해 재현된 궁중무용은 순서는 찾을 수 있지만, 춤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나 멋은 되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선생의 존재 값어치”를 말했고, 김매자는 「창무회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스승님」이 바로 김천흥 선생이었다고 전제하면서 1975년 서울(명동극장)에서 창작공연을 했을 때, 많은 사람이 외면했으나, 선생님만은 격려해 주셨던 점을 기억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리고 김은희는 1997년 하와이 주립대 대학원 첫 학기 때, <정농악회(正農樂會)>의 초청공연에서 홍보와 통역을 맡으면서 선생과 인연이 되었다는 점, 당시의 천진난만한 아이와 같은 선생의 미소와 식사 전, 조물주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점이 인상적이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해 주었다. 1997년도 하와이 주립대에서 한국 <정농악회(正農樂會)>의 초청 공연이 이루어졌는데, 이 단체는 어떻게 결성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심소 선생의 역할은 어떠했는가? 하는 이야기로 이어가 본다. 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