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근현대사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자국의 자연재해(관동대지진)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라시노수용소에서 끌려나와 하룻밤 묶여 지새운 관음사 뜰 안의 은행나무 그루터기에 화려한 버섯이 피어난다 5분 거리 다카쓰구 마을의 공유지인 나기노하라에서 생죽음을 당한 뒤 백목련 나무뿌리에 얽히어 묻혀있다가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이국 하늘 바라보고 위령의 종소리로 고국의 향수를 달랬다. - 정종배 <관음사 보화종루 앞에서> 가운데 - 1923년 9월 1일 낮 11시, 일본 관동지방(도쿄도, 가나가와현, 사이타마, 군마, 도치기, 이바라기, 치바현)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리히터 지진계로 7.9도를 기록한 이 큰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이를 일본에서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간토다이신사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관동대지진, 간토대지진, 간토대학살’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최근에는 ‘ 1923 간토대학살’로 부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를 더 명확한 말로 고친다면 ‘1923 조선인 간토대학살’ 이라고 부르는 게 그 사건의 의미가 분명해질 듯하다. 무고한 조선인들이 1923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성공회와 아우내(병천)의 역사는 깊습니다. 1904년 무렵, 성공회 선교사들이 이곳 아우내에 들어와 맨 먼저 한 일은 교회 설립이 아니라 진명학교 등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김구응 선생은 성공회에서 세운 진명학교에서 제자를 키우면서 한편으로는 사재를 털어 기숙형 학교인 청신의숙(淸新義塾)을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무렵 거국적인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김구응 선생은 제자들과 지역 유지들을 규합하여 4월 1일 아우내장날을 기해 ‘4·1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일제의 총칼에 어머니와 함께 현장에서 순국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는《김구응열사평전: 4·1아우내만세운동의 주역, 이하 김구응열사평전》을 쓴 전해주 신부의 이야기다. 어제(4월 1일) 낮 2시, 충남 천안의 성공회 병천교회 시몬관에서는 아우내만세운동 104주년을 맞아 아주 특별한 추념 행사가 열렸다. 그동안 아우내만세운동의 주역이면서도 역사에 묻혀있었던 최정철(1854~1919.4.1.순국), 김구응(1887~1919.4.1. 순국) 열사의 삶을 조명하는 책 《김구응열사평전》(틈새와시간 출판)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김구응열사평전》출판기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