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그림이란 화면에 무엇인가를 채워 넣어 표현하는 것이지요. 서양 유화의 경우 화면을 빈틈없이 채움은 물론 여백까지도 철저하게 계산해서 묘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옛 그림들을 보면 많은 여백이 나타납니다. 최고의 경지에 다다랐던 단원 김홍도의 그림들이 그렇고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가 그렇습니다. 서양 유화와 달리 왜 우리 예 그림들은 빈 공간을 많이 남겨 둘까요?
그림에 있어서 여백이란 화가가 그리지 않고 일부러 남겨둔 부분입니다. 일부러 남겨둔다면 화가가 자신이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은 아닐까요? 화면을 여러 가지 소재 심지어는 구름과 공간까지도 모두 묘사해야 하는 의무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것은 또 여백을 둠으로써 감상하는 사람에게도 그 해방감을 같이 맛보게 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여백이란 자유를 얻은 새가 조롱에서 벗어나듯이, 그림 속의 조롱을 없앤 공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 단원 김홍도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
이런 그림 속의 여백을 뛰어나게 구현한 그림 가운데 단원 김홍도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가 있지요. 안개가 어스름히 낀 어느 강가에 배를 띄운 풍채 좋은 노인은 몸을 뒤로 젖혀 절벽 위의 매화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대부분은 여백입니다. 또 노인이 바라보는 매화는 언덕에서 가장자리로 가면서 묵선(墨線)의 농담이 흐려지는 동시에 물기도 빠져 점차 완전한 여백 속으로 사라져갑니다. 이런 여백이 아름다운 그림은 서양 유화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기 어렵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