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경서도 소리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노학순 명창과 <경토리민요단>의 8,15 특별 공연의 이야기를 하였다. <경토리 민요단>이란 말에서 경(京)은 서울 경기지방을 의미하는 말이고, 토리란 그 지역의 특징적인 창법이나 음계, 분위기 등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점, 노학순명창이 지도하는 이 단체는 국악계 대소 기획공연은 물론이고 산골마을이나 해안가의 소외지역을 찾아다니며 경서도 민요의 멋을 전파하는 소리의 전도사역도 맡아왔다는 이야기, 국내뿐 아니라, 일본이나 호주, 러시아, 중국, 베트남, 캐나다, 미국 UCLA 와 한국문화원 등에도 초청되어 민간 외교사절로도 적극적인 활동을 해 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노학순 명창은 이은관, 이은주 명창에게 배워 전수, 이수자가 되었고 현재는 서울시 재담의 보유자인 백영춘 문하에서 산타령, 장대장타령, 재담소리를 사사하여 전수교육조교로 인정받은 노력형 소리꾼이라는 점, 광복70주년을 맞는 기념공연에서 회심곡, 동부권의 민요, 서울의 휘모리잡가, 산타령, 해방가 등을 선보인다는 이야기, 특히, <해방가>는 나레이션을 곁들여 아리랑, 해방가, 경복궁타령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
||
▲ 공연이 끝난 뒤 제자들과 다정한 모습의 이은관 명인 |
이번 주 속풀이에서는 작년에 세상을 떠난 서도소리의 지존, 이은관 명인의 제자들이 선생을 그리워하면서 정성껏 준비한 특별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선생은 17세 나이에 서도소리에 입문하여 97살 나이로 타계하기 전까지 평생을 오로지 배뱅이굿과 함께 살다간 진정한 소리꾼이었다. 무대공연이나 방송, 또는 영화 출연을 통해서 전통의 서도소리, 그 중에서도 1인 소리극조의 <배뱅이굿>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유산이었나 하는 점을 일깨워 주었고, 전수교육에 몰두하면서 새로운 신민요의 작사, 작곡, 그리고 창작 소리극 제작에 앞장서는 등, 서도소리를 위한 전방위 활동을 해 온 이 시대 최고의 소리꾼이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선생을 ‘배뱅이굿의 지존’으로 부르는 것이다. 아마도 <배뱅이굿=이은관>, <이은관>은 곧 배뱅이굿 이라는 등식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선생이 서도소리의 지존으로 그 자리를 오래도록 지킬 수 있었던 배경이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도 서도소리에 어울리는 목청을 타고 난 위에, 후천적 노력을 남다르게 해 왔다는 점일 것이다.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높고 맑은 목청은 고저(高低)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관객의 가슴을 시원하게 풀어주었고, 정성을 다하는 소리와 연기는 관객을 흡인(吸引)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 첫 번째 배경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선생은 다른 소리꾼들과는 달리 기존의 불규칙 장단의 민요를 수십 명이 제창할 수 있도록 장단을 배열하는 작업이나 신민요, 또는 창작민요에 관심을 두고 작곡활동을 하였다는 점과 섹소폰이나 아코디언과 같은 서양악기를 다루어 한양합주도 능했던 분이라는 점이 포함된다. 이 모든 능력은 역시 독보 능력을 갖추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는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을 철저하게 지켰다는 점도 지존의 자리를 유지한 배경이 될 것이다. 식사시간, 자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 연습하는 시간, 등등을 스스로 정해 놓고 지키려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배경은 상대의 조언을 경청하는 겸손한 마음가짐의 소유자라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겸손한 마음과 관련하여 선생과의 재미있는 일화가 떠올라 소개하고자 한다.
![]() |
||
▲ 생전에 색소폰 줄기를 즐겼던 고 이은관 명인 |
지금은 서도소리의 중견이요, 연기자이며 방송인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는 박정욱 군이 대학로 극장에서 3일간 발표회를 갖게 되어 해설 겸 격려사 요청을 받고 갔을 때의 일이다. 그 때 제자의 무대에 특별출연 차, 이은관 선생도 참석했던 것이다.
나는 선생에게 <배뱅이굿> 속에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3정승이 신수가 불길한 탓인지, 한 집은 딸을 낳고, 한 집은 계집아이, 또 한 집은 여자아이를 낳게 되었다”는 여성비하의 내용은 시대에 맞지 않으니 “신수가 불길하여”를 “신수가 대통하여”로 고쳐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의견을 제시했던 것이다. 선생은 지체 없이 전에도 지적해 준 점을 기억하고 있다면서 “전통이라고 해서 고집하고 싶지 않다. 당장 고쳐 부르겠다”고 흔쾌히 대답하던 기억이 난다.
또 한 번은 공연무대에서 장고를 돌리기 위해 연습을 하고 있을 때였다. 누구도 만류할 입장이 못 되어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선생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 내가 “장고는 국악인이라면 누구나 필수 악기로 가까이 하는 악기 입니다. 문화재 선생께서 장고를 돌리며 재주를 보인다고 하는 것은 악기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예상한대로 선생은 나의 제의에 흔쾌히 “알려 주어 고맙다.”면서 돌리기 연습을 접는 모습을 보면서 선생의 높은 인품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요무형문화재로 배뱅이굿이 지정되고 그 전승체계를 마련하면서부터 선생은 이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로 활동하면서 서도소리나 배뱅이굿이 소리세계의 한 변방이 아니라, 독립된 장르의 서도창극조 임을 당당하게 알렸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도 선생의 공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기만 한 것은 아직도 이 분야의 전문가 육성이나 애호가의 층이 엷기만 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더욱 이은관 명창의 존재가 국악계나 서도소리계의 후진들에게는 크고 높은 산으로 인식되어 더욱 그리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은관 명창 떠나간 1년 남짓, 선생에게 배움을 청했던 모든 제자들이 선생을 그리워하며 뜻을 모으고, 마음을 합하여 2015년 8월 22(토) 17;00에 서초동 소재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선생을 위한 무대를 준비했다고 한다.
선생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한국서도소리 연구보존회》 박정욱 이사장이 기획과 연출, 그리고 선생의 제자들로 구성된 《효 배뱅이굿 예술협회》 전옥희 위원장이 앞장을 서고 있다. 전옥희 역시 선생의 생전 공연이나 각종 행사에는 그림자처럼 수행하던 제자로 기억하고 있다. 수십 명 제자들이 참여하는 큰 무대에 속풀이 독자들도 함께 하시기 바라며 배뱅이 만나러 떠난 이은관 명창의 소리를 그 제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만나보시길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