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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경기소리의 전설, 묵계월 명창 떠나간 1년

[국악속풀이 225]

[한국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작년에 세상을 떠난 서도소리의 지존, 이은관 명인의 제자들이 선생을 그리워하면서 정성껏 준비한 특별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은관 명인은 17살 나이에 서도소리에 입문하여 97살로 타계하기까지 평생을 오르지 배뱅이굿과 함께 살다간 진정한 소리꾼이었다는 이야기, 무대공연이나 방송, 또는 영화 출연을 통해서 전통의 서도소리, 그 중에서도 1인 소리극조의 <배배이굿>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유산이었나 하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서도소리의 지존으로 그 자리를 오래도록 지킬 수 있었던 배경이나 원인은 높고 맑은 목청으로 정성을 다하는 소리와 연기, 독보 능력을 갖추고 창작민요와 작곡활동에 전념해 왔다는 점,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을 철저하게 지켰다는 점, 상대의 조언에 경청하는 겸손한 마음가짐의 소유자라는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배뱅이굿> 속에 나오는“신수가 불길하여 한 집은 딸을 낳고, 한 집은 계집아이, 또 한 집은 여자아이를 낳게 되었다”는 여성비하의 내용은“신수가 대통하여”로 고쳐 부르겠다고 약속한 이야기, 공연무대에서 장고를 돌리는 재주는 악기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일이라는 지적에 연습을 접었다는 이야기, 오늘날 서도소리나 배뱅이굿이 소리세계의 한 변방이 아니라, 독립된 장르로 당당히 자리 잡게 된 것은 선생의 공로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제자와 함께 소리를 하는 묵계월 선생(왼쪽)

이번 주 속풀이에서는 고 묵계월 명창의 1주기를 맞아 임정란을 위시한 그의 제자 일동이 2015년 8월 25일, 장충동 소재의 국립극장 무대에 올릴 묵계월 추모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의 일이다. 묵계월 명창으로부터 급히 좀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묵 선생과 제자 1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편지봉투 하나를 전해 주며 “밤새 쓰고 지우고 했는데 글이 제대로 되었는가를 살펴 달라”는 것이었다.

열어보니 경기민요에 몸담고 살아온 지난날의 영욕이 스크린처럼 펼쳐지고, 그러면서 앞으로의 발전을 기원하는 마음이 구구절절이 담겨져 있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결론은 자신의 능력이 한계에 다다라 국가가 인정해 준 예능보유자 자리를 물러나야겠다는 결의에 찬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문화재청장 앞으로 보내는 일종의 보유자 명퇴서였던 것이다. A4 5장 분량의 긴 내용으로 그 시작은 이렇게 하고 있었다. 
 
“존경하는 문화재청장님,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의 예능보유자 묵계월(본명-이경옥)입니다. 국가가 인정해 준 보유자의 자리를 명예롭게 퇴진하고자 청원을 드립니다.(중략)

지난 1975년, 보유자로 인정받은 이후, 올해 2004년은 꼭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국가의 은덕으로 30년이라는 긴 시간을‘인간문화재’라는 분에 넘치는 대접과 예우를 받아 왔으니 진정으로 국가와 문화재청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나이를 먹어 팔십하고도 넷이 되고 보니,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끼게 되어 제자들에게 소리를 지도하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 집니다. 나이 먹어 능력은 점점 떨어져 가는데, 나 좋다고 마냥 보유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국가에 대한 예의나 보유자의 태도가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이하 생략)”
   
경기소리를 부르며 평생을 살아온 노명창이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어 자신의 예능을 전승시켜 나갈 능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으며, 이를 통탄하며 국가가 맡긴 소임을 더 이상 충실히 이행해 나갈 수 없다는 점, 그래서 더 이상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 없다는 양심의 고백은 옛 청백리(淸白吏)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 속담에 오뉴월 모닥불도 쬐다가 물러서면 서운한 법이라고 했는데 어찌 섭섭지 않겠는가!

기실 자신의 능력은 뒤돌아보지 않고 자리에만 연연하거나, 제자들, 혹은 가족들에게 귀중한 업무를 맡겨 놓는 보유자들도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묵계월 명창처럼 보유자 자신이 스스로 그 자리를 용퇴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치 현실이 아닌 먼 먼 옛 이야기같이 훈훈하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것이다.

 

   
▲ 제자 임정란 명창(왼쪽)의 소리에 장단을 쳐주는 묵계월 선생

경기민요의 큰 소리꾼으로 어려운 시대를 노래와 함께 살다 간 묵계월 명창은 1921년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해 있을 무렵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은 매우 가난해서 어려서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이는 딸에게 소리 공부를 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딸의 장래를 위해 어머니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딸 경옥을 묵씨네 집안에 양녀로 보내는 결정이었다.

경옥을 받아들인 양모 또한, 양녀를 소리꾼으로 키우기 위해 유명한 소리꾼 주수봉(朱壽奉)을 독선생으로 모시는 등 최선을 다하였던 것이다. 주수봉은 2년여 어린 묵계월을 지도하면서 그녀의 남다른 소질을 확인하고는 당대 속요계를 주름잡던 큰 선생, 최정식(崔貞植) 사범에게 보내주게 된다.

최정식은 학강 최경식의 제자였다. 학강의 큰 제자로는 최정식 외에도 유개동, 박인섭, 김태봉, 김순태, 정득만, 이창배 등 기라성 같은 명창들이 있었다. 이 중 큰 제자가 바로 최정식이지만, 선생 앞에 오랫동안 소리를 많이 배워서 선생의 뒤를 이은 명창은 50년대 이후 경서도 소리를 크게 확산시킨 벽파(碧波) 이창배(李昌倍) 사범인 것이다.  
주수봉의 배려로 해서 묵계월은 최정식 사범 문하에서 경서도 소리의 전반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소질과 재주가 있는 제자를 붙들고 큰 선생에게 보내주지 않아서 사제간의 인연이 끊어지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는 현실 속에서 주수봉 명창의 넓은 마음이나 결단도 고마운 결정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묵계월은 어린 시절부터 노래 부르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래서 새로운 노래를 배우면 하루 종일 연습에 몰두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날 배운 소리는 그날로 완전히 암기하고 자신 있게 부를 수 있을 때까지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고 있을 정도이다. 그야말로 연습이 곧 생활이었고, 또한 생활이 곧 연습이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다음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