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곽재기[1893∼1952] 선생은 충북 청주사람으로 일찍이 서울에 올라와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청주 청남학교(靑南學校) 교사를 지내며 1909년 청소년으로 조직한 비밀단체인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의 당원이 되어 80여 당원과 더불어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지하공작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같은 해 7월 황상규(黃尙奎)·윤소룡(尹小龍)·김기득(金奇得) 등과 함께 만주 길림성 동녕현(東寧縣) 소수분(小綏芬)으로 건너가 이성우(李成宇)외 여러 동지와 알게 되면서 동년 11월 9일 김원봉(金元鳳)·이성우(李成宇)·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鍾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喆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 등과 일제의 관리·밀정·관공서 등을 주살·파괴함으로써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무력으로써 독립을 쟁취하려는 강력한 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다.
▲ 곽재기 선생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 등을 파괴하여 전국의 인심을 자극하기로 결정하고 황상규(黃尙奎)는 먼저 길림(吉林)에서 폭탄의 제조방법을 배우고 그는 김기득(金奇得)과 함께 상해로 가서 폭탄구입에 힘썼으나 자금관계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길림에 돌아왔다.
길림으로 돌아온 후 자금조달에 노력하다가 이성우(李成宇)와 함께 다시 상해로 가서 1920년 3월 폭탄 3개와 이에 필요한 약품을 구입한 다음 동지 조현상(趙賢尙)과 운반방법을 의논하고 임시정부 외무차장 장건상(張建相)에게 의뢰하였다.
장건상은 이것을 우편으로 안동현(安東縣) 세관에 있는 영국인 's·포인'에게 보내주었다. 그는 즉시 안동으로 와서 소포를 찾은 뒤 그곳에서 황상규(黃尙奎)·윤소룡(尹小龍)과 상의하고 동지인 이낙준(李洛俊)의 손을 거쳐 경남 밀양청년단장 김병환에게 보냈다.
그리고 서울에 잠입하여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보내온 폭탄 13개를 만들만한 탄피·약품·부속품 등과 미국제 권총 2정 및 탄환 100발을 받은 다음 짐짝을 만들어 서울 천보상회(天寶商會)의 손을 거쳐 운동점에서 밀양으로 부쳐 김병환(金 煥)의 집에 감추었다.
같은 해 6월 서울에서 동지들과 날마다 처소를 바꾸면서 총독부·동양척식회사·경성일보사 등을 폭파하고자 그 정황을 밀탐하던 중 이 사실을 탐지한 경기도경찰부(京畿道警察部)에 동지 6명과 함께 피체되고 경상남도 경찰부로 이송되어 극심한 취조를 받고 1920년 7월 31일 서울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 영도(永島) 예심판사의 손에서 예심이 종결되고 동년 6월 7일 공판이 개정되어 이동(伊東) 재판장이 입에 웃음을 띄우며 사실을 묻자, 그도 역시 웃으며 "재작년 7월 중국 길림성으로 갔는데 갈 때의 목적은 두 가지이니 첫째는 국내에 되도록 많은 폭탄을 수입할 일과 둘째는 해외의 조국독립운동 현황을 시찰하고자 간 것인데 이와같은 취지를 정한 본래의 마음은 재작년 3월 이래로 조국독립운동을 입과 붓으로는 구할대로 구하고 원할대로 원하였으나 피로써 구한 일은 없음으로 그와같은 무기를 사용하여 피로써 구하고자 원하였는데 우리는 군함도 없고 대포도 없으며 폭발탄·육혈포밖에 구할 수 없었다"고 대답하여 독립에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날 검사는 징역 10년을 구형하였고 동년 21일 징역 8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0년 다시 국외로 망명하여 만주·상해·노령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광복을맞아 11월 귀국하였다. 귀국후 한국 '에스페란토'어학회를 운영하는 한편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52년 1월 10일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1909 대동청년당 가입
○ 1919 3.1운동 참여, 의열단 조직
○ 1920 식민통치기관(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등) 폭파 기도
<자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