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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식

대한통의부 의용군에서 맹활약한 이의준 선생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924년 1월 김지섭 선생의 도쿄 의거는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독립운동계에 활기를 주었다. 이어서  5월 19일 이의준 선생을 비롯한 참의부 독립군 결사대가 압록강을 따라 국경을 순시 중이던 사이토 총독을 기습, 공격하는 쾌거를 이룸으로써 독립운동계에 일대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 같은 저격 작전을 주도한 선생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재판기록에 나타나는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선생의 본적은 평안북도 위원군(渭原郡) 밀산면(密山面) 송주동(松奏洞)이고, 태어난 해는 1893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선생은 만주에서 대한통의부와 참의부에 소속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할 때 이병준(李秉俊), 한권웅(韓權雄) 등의 이명(異名)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재판 당시 재판장이 선생을 부르자, 언권의 자유를 주지 않으면 공술을 거절한다고 강경히 주장하던 육척 장신에 검은 얼굴의 선생이 나서자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앉은 방청석에서는 삼국지에서 본 장비(張飛)와 같다고 속삭였다고 하는 기사가 선생에 대한 인상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로 볼 때 선생은 매우 건장한 체격에 의지가 굳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무골이요 불요불굴의 독립군 용사로 생각된다.

선생은 1923년 1월 향리인 평북 위원군과 압록강을 경계로 마주보고 있던 중국 만주의 집안현으로 망명한 뒤, 유수림자(楡樹林子) 두도구(頭道溝)에 근거지를 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의용군(義勇軍) 제1중대에 투신한 것으로 보인다. 만주 독립군은 1920년 10월 경신참변과 이듬해 6월 자유시참변으로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 참의부가 있었던 중국 집안현, 애석하게도 이의준 선생에 관한 사진은 단 한장도 남아 있지 않다.

이에 자유시참변 직후 북만으로 돌아온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밀산과 영안현을 중심으로, 구춘선(具春先)이 이끄는 대한국민회 계통의 병력은 돈화와 액목현을 중심으로, 신민단, 광복단, 한민단 등의 병력도 각기 영고탑, 목단강, 동녕현 등지를 중심으로 1921년 말까지 진영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들 독립군단들은 이미 많은 전력의 손실을 입어 일제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따라서 북만지역에 산재하여 포진하고 있던 각 독립군단은 1922년 8월 통합운동을 일으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김동삼, 고할신, 오동진 등이 주도하여 이끌어 간 대한통의부는 중앙조직의 행정부서와 사법기관인 사판소 및 입법기관인 중앙의회를 설치하여 준국가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그리고 남만의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거주하고 있는 한인동포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지방조직까지 설치하였다. 또 그 아래 5개 중대와 유격대 및 헌병대 등 7개 부대로 편제된 의용군(義勇軍)을 조직하고, 이를 분산 배치하여 효율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펼쳐 나갔다.

선생은 이 같은 통의부 의용군에 참여하여 채찬(蔡燦 일명 白狂雲)이 중대장으로 있던 제1중대에 소속되었고, 이어 제2소대장으로 선임된 것 같다. 통의부 의용군 제1중대 제2소대장으로 선임된 선생은 곧 바로 국내 진공작전을 추진하였고, 그것은 1923년 6월 6일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이 날 선생은 김정욱(金貞旭) 등 4명의 소대원들을 이끌고 국내로 진입하여 독립군자금 모집 활동에 나섰다. 그러다가 평북 강계군(江界郡) 어포면(漁雹面) 풍룡동(豊龍洞) 골짜기에서 평북경찰부 수색대와 맞닥뜨려 교전하는 바람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엿새가 지난 6월 12일의 국내 진공작전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날 선생은 송선호(宋善鎬) 등 3명의 소대원들과 함께 평북 위원군 봉회면(鳳回面) 노동령(蘆洞嶺) 부근에서 우편 배달부를 공격하여 강계군 고산령(高山嶺)우편국에서 위원우편국으로 이송하는 각종 서류와 소포 등 우편물을 노획하였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1천 5백원의 현금도 들어 있었기 때문에 기대 이상의 군자금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선생의 국내 진공작전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같은 해 7월 초순 전용규(田龍奎) 등 3명의 소대원들과 함께 다시 평북 위원군 대덕면(大德面)에 들어가 장기섭(張基涉)의 집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여 귀환하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 보름이 지난 그 해 8월 20일에도 선생은 국내 진공작전을 벌였다. 이 날 선생은 이화주(李化周) 등 일곱 명의 소대원을 이끌고 평북 강계군 풍청동(豊淸洞)에 들어가 경찰관 임시 파출소를 공격하여 일경을 사살한 뒤, 파출소와 부근 일본인 민가를 소각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통의부 의용군 제1, 2, 3, 5중대와 유격대 및 독립소대를 주축으로 이뤄진 참의부는 집안현 화전자(花甸子)에 본부를 두고, 재만 한인의 자치활동보다 적극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실천하는데 힘썼다. 특히 임시정부의 직속 부대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긍지와 자부심이 매우 컸다. 그리하여 이들은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수괴인 조선총독에 대한 저격, 암살 계획을 추진하였다. 더욱이 이 시기 조선 총독 사이토는 1924년 6월 제국의회의 개최를 앞두고, 식민지 통치체제의 안정을 대내외에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한층 확고히 할 심산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압록강을 따라 국경을 순시할 계획을 공개적으로 표명해 놓고 있었다.

 이 같은 정보를 입수한 참의부는 사이토 일행에 대한 공격, 암살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그 중책을 맡은 것이 제1중대 제2소대장인 선생이었다. 선생은 참의부의 참의장 겸 제1중대장 채찬의 명령을 받아 제3소대장 장창헌(張昌憲)와 김창균(金昌均), 현성희(玄成熙), 이명근(李明根), 김여하(金麗河), 전창극(田昌極) 등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그런 다음 1924년 5월 19일 웅비호(雄飛號)를 타고 압록강을 따라 내려가며 국경을 순시하던 사이토 일행을 평북 위원군 마시탄(馬嘶灘)의 대안에서 급습하였다.

 선생이 거느린 결사대는 마시탄의 중국측 대안인 집안현(輯安縣) 사랑곡(四狼谷) 팔합목(八合目)에 잠복하고 있다가 사이토 일행을 향하여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하던 호위선 비조환(飛鳥丸)의 경비병들과 수행원들은 대항 사격을 가해 왔다. 그리하여 쌍방간에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이 틈을 이용하여 사이토 일행을 태운 웅비호가 쏜살같이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조선 총독 암살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국경 지방에 대한 일제의 경비가 강화되었고, 독립군 부대에 대한 탄압 작전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선생은 소대원들을 이끌고 국내 진공작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뿐만 아니라 선생은 친일 밀정 처단 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선생은 이 해 6월 평북 강계군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어운면 동부동(東部洞)에서 밀정 노릇을 하던 자를 잡아다가 장갑골에서 총살, 처단함으로써 부일 친일배들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1925년 6월 19일에는 24명의 소대원을 거느리고 강계군 창곡산(倉谷山)에서 강계경찰서의 수색대를 습격하여 오랫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 같이 만주지역에서 선생을 비롯한 참의부 및 기타 독립군 부대에 의한 항일 무장투쟁이 고조되어 조선 총독 암살, 저격 사건까지 발생하자 일제는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였다.그런데 이 때 선생은 재판장이 개정을 알리기도 전에 앞에 나아가 어떤 일이든지 변명할 시간과 기타 공술의 자유를 충분히 주지 않으면 일절 진술하지 않겠다고 일갈하였으니, 선생의 기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이후 선생은 신의주지방법원을 거쳐 1928년 11월 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는데, 이 때에도 선생은 이미 각오한 바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서 독립군 용사로서의 불굴의 의지와 기개를 잃지 않았다.

 독립군 용사로서 이 같은 당당함을 간직한 채, 선생은 1929년 1월 25일 일제의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