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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백년편지 228] 김찬규 할아버지께 -오영숙-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외증손녀인 오영숙 인사 올립니다. 오늘 저는 100년 편지 청탁을 받고,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대전 국립현충원을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린 늦가을에 할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괜히 마음이 설레더군요. 현충원에는 일제의 압제에서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애국지사 묘역부터 6·25전쟁 영웅들과 분단국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천안함 폭침 희생자 묘역까지 우리나라의 안타까운 근·현대사의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묘역에 묻히신 분들은 모두 애국애족의 나라 사랑 정신으로 불같이 뜨겁게 살다 가신 호국 영령들이었습니다. 백합꽃 한 아름과 태극기를 할아버지 묘역에 꽂고 절을 올리고 나자 할아버지께서 저를 반겨주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먹먹하여 한참을 할아버지 비문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비문에는 이조판서 예안 김백암 선생의 11대손으로 망국 조약 륵결에 비분강개하여 통정대부승정원비서승 벼슬도 버렸고 국치를 당하자 항일독립 전선에 신명 바쳐 싸우셨네. 노백린 장군이 보낸 모금 위임장에 따라 군자금 조달하다 옥고 2년 또 5년 치르며 모진 고문 다 견디고 순국하셨네. ! 님은 가고 봄은 왔네.’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 대전 국립현충원 김찬규 선생 무덤

제가 어렸을 적부터 김찬규 할아버지께서는 일제에 침탈된 조국을 찾기 위해 항일 독립군의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국내외에서 모금활동을 하시다가 피검되어 투옥되어 고초를 겪고 그 후유증으로 순국하셨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서 많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김찬규 할아버지의 약력을 잠깐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864년 경북 영주에서 출생, 1905년 을미 조약 후 통정대부 승정원 비서승사임, 1919년 만세시위 대동단에 가입, 1920년 비밀결사 의용단을 조직하여 남만 군정서 군자금 조달, 1921년 만주로 망명 국경을 넘나드는 독립투쟁을 했으며, 1922년 군자금 조달활동 중 피검되어 16월형 받음, 1925년 임시정부 노백린 군무총장의 밀명을 받고 활동 중 피검 5년형을 받음, 19291112일 고문여독으로 병보석 귀가 도중 순국하셨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셨습니다. 

저의 친정어머님이 전하는 김찬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다음과 같습니다. 방학 때 영주에서 할아버지를 뵌 기억이 있다고 하셨는데, 아마도 1929년 초등학교 1학년의 기억인 듯합니다. 평소에 독립자금을 운반하면서 나라 안팎에서 활동하셨다고 했는데 하루는 만주, 하루는 고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셔서 혹시 축지법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신출귀몰한다는 어른들의 얘기를 듣고 저의 어머니는 김찬규 할아버지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줄 알고 자꾸 팔을 들어 만져보면서 날개가 있는지 확인을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얀 수염이 신기해서 할아버지의 수염을 만져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호기심 많고, 철없던 서울 출생의 손녀를 몹시 귀여워 해주셨다는 얘기를 자주 해주셨습니다. 만주벌판을 종횡무진하며 독립운동을 하시던 강직한 분이 아닌 자애롭고 온유한 할아버지로 어머니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왜 저의 외조부이신 김건 할아버지는 만주로 망명을 가시게 되었느냐는 저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저의 어머니의 외조모인 장모는 상당한 재력가로 자신의 사위인 김건 할아버지를 위해 서울 적선동(현재의 세종문화회관 뒤)에서 여관을 운영하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김건 할아버지는 일본군의 의심을 피하고자 여관을 운영하면서 부친인 김찬규 할아버지를 도와 대동단을 통해 전국에서 모금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전달하는 장소로 사용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저의 어머니의 기억에 의하면 대문 앞에서 놀고 있는데 새우젓 사려하고 새우젓 장수가 여관에 들어가거나, 행상이 들어가면 대문 앞에서 일본 경찰들이 집으로 들어온 새우젓 장수나 행상을 잡아가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외조부 김건 할아버지도 종로 경찰서에 잡혀가서 손톱 밑에 고문을 당하는 등 부친인 김찬규 할아버지로 인하여 고초를 겪게 되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덕수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듬해인 1930년에 외조모마저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부인의 죽음과 독립 운동가의 가족에 대한 일제의 만행이 날로 심해지면서 결국 김건 할아버지는 고국을 떠나 만주로 망명을 가시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 저의 어머니는 외조모와 단둘이서 2~3년을 같이 사시다가 외조모마저 장티푸스로 돌아가시게 되자, 사고무친인 저의 어머니는 31운동, 33인 중 한 분이신 권병덕 선생의 댁에서 1년간 기거하게 되었는데 당시 권병덕 선생의 아드님과는 동갑이었었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하셨습니다.  

불과 80여 년 전에 일어난 역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슬프고 고단한 가족사는 저의 외갓집의 경우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면 모두 겪었던 역사이기도 합니다. 결국, 나라의 불행은 개인의 불행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찬규 할아버지는 승정원에 계셨고 나라를 빼앗기자 그 책임을 통감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치셨는데 그 결과 집안은 쇄락하게 되고 입신출세가 불가능하게 되어 자신을 비롯하여 그 가족들의 삶은 그야말로 고달프게 되었답니다. 20년쯤 전에 미국에서 오신 이모님께서 김찬규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당대에 융성하던 집안이 몰락하여 옹색하게 된 친정집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화가 나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재산과 목숨을 바치신 분들과 그 가족에 대한 충분한 예우와 보살핌이 그동안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저 역시 6~7년 전에 김찬규 할아버지의 본가인 영주에 들렀을 때도 김찬규 할아버지를 기리는 사당인 야일당과 본채가 너무나 초라하고 낡은 모습에 20여 년 전에 이모님의 느끼셨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김찬규 할아버지! 저는 오늘 대전 현충원에서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신 할아버지의 용기와 조국에 대한 큰 사랑에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라는 엄중한 문구를 가슴에 새기며, 또한, 강직한 눈매에 하얀 도포를 입으시고 부드러운 흰 수염을 만지면서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열심히, 바르게 사는 후손들을 기쁘게 바라보시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 당신이 현충원에 계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희 후손들은 우리 자손들에게 번영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하여 더 열심히 노력하고 선대들의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김찬규 할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오영숙 

국립제주대학교 일본어과 제1회졸업

한국외대 대학원 졸업(일문학 석사)

국립 충남대학교 일어일문과 박사 졸업(일어학 박사)

장안대학 일어과 겸임교수 및 강사역임

현 국립한경대학교 교양학부 및 국립충남대학교 일어일문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