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송종익(宋鍾翊, 1887. 2. 27~1956. 1. 7)선생은 1887년 2월 27일 경북 대구에서 부친 송인구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1905년 일본에 유학하였다가 큰 뜻을 펴고자 1906년 4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소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당시 한인들의 항일민족 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였다.
1908년 3월에 일제 통감부의 외교고문인 스티븐스(stevens, d. w.)가 샌프란시스코의 각 신문에 일제의 한국의 보호국화를 왜곡 선전하자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선생은 이들 두 의사의 법정 투쟁에 대비하여 조직된 재판후원회의 재무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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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익 선생 |
한편 1912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의 리버사이드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와서 맨 먼저 선생에게 흥사단 약법의 초안을 보이고 상의했다. 이때부터 선생은 흥사단의 첫 동지가 되어 일생을 단(團) 운동에 바치게 된다.
흥사단 미주본부를 이끌다
흥사단은 1913년 창단 이후 1920년까지 8년 간 창단위원회에서 운영하였고 1921년부터 이사부와 의사부, 심사부의 3부역원제가 실시되었다. 선생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이사부장을 맡았고 1926년부터 1936년까지는 이사부 재무원으로 안창호의 부재 시에는 실질적으로 흥사단을 이끌어 갔다. 흥사단은 미주지역에서 창단되었으나 중국에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와 국내에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결성되어 세력을 확장해 갔다. 창립자인 도산 안창호는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노동협판 등 정부요인으로 활동하였으므로, 흥사단 미주본부의 사무는 선생의 주재 하에 이루어졌다. 선생은 흥사단 활동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도산의 가족까지도 보살피는 등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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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중국지역 독립운동 세력의 지원을 위해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세워 재정 확충에도 힘썼다. 주식회사를 통해 적립된 자본으로 중국에 은행을 세워 독립운동 자금을 항시적으로 확보하고 국제간의 신용을 높인다는 원대한 계획이었으나 벼농사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선생은 이후 대한인국민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등 미주지역의 주요 단체에서도 활동하지만 그 기반과 정신적 근원은 모두 흥사단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은 평생을 흥사단에 헌신하면서 흥사단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한편 이러한 정신을 널리 알리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낮에는 백인의 집에서 품을 팔아 그의 동지를 보양하며 밤에는 서류를 만들어 단원들의 향단심(向團心)과 애국심을 일으키기에 힘썼다. 흥사단의 단기(團旗)에 대한 선생의 시는 이러한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둑서 바람에 날리고/장하다 네 빛 네 정신아/
기러기 펄펄 일어나고/둥그럼 훨훨 지어온 바/
우러러 네게 경례하며/갖추어 내가 노래하며/
높고 깊은 근심 걱정이/한 없이 절로 위로되네/
백두산 바라는 남녀야/황홍백남 자랑하오/
기초준비 튼튼히 기해/한길로 나아 나아 가세
재미한족연합의원회 재무 관리자로 독립자금을 조달하다
1919년 3.1운동에 이어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선생은 미주 대한인국민회의 재무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설의 경비조달에도 참여하였다. 1922년 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대의회의 결의로 지방총회를 폐지한 후 미주 멕시코 쿠바에 있던 지방회들만으로 국민회를 재편성하고 북미 대한인국민회라 개칭하였다. 그 후 일제가 만주사변을 도발하고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자 1936년 5월 국민회는 미주 각 지역의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항일역량의 결집을 시도하였다.
선생도 이에 참여하여 김호, 이살음, 송헌주 등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의 후원에 힘을 쏟았다. 선생은 총회관 건축위원에 선임되어 국민회의 중흥에 노력하는 한편 임시정부를 비롯한 중국지역 항일세력의 지원도 계속하였다. 국민회는 특히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광복 때까지 외교사업과 국방후원 및 동포들의 전시안녕 보장을 주도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 편성을 후원하였다.
1941년 4월 하와이 국민회 및 동지회와 북미 국민회 등은 하와이 국민총회관에서 대한민족이 대동단결하여 독립전선에 역량을 집중하고 광복대업을 촉성할 것을 목적으로 해외 한족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는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등 세계정세의 변화에 호응하고 종래 분산적으로 전개되던 독립운동 및 지원활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미주지역 운동단체들의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그 결과 대한민족의 독립운동과 항일전선을 통일하여, 항일승리를 획득하기 위해 재미한인단체들을 규합, 그 역량을 집중하여 일반 운동을 확대 강화할 것을 표방하며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를 조직하였다. 한족연합위원회는 로스앤젤레스에 집행부와 호놀룰루에 의사부를 두어 각각 임원을 선정하고 1943년 봄까지 독립자금을 수합하여 3분의 2는 임시정부에 보내고 3분의 1은 구미위원부에 보내어 광복사업비에 보충케 하였다. 선생은 미주대표로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집행부 재무에 선임되어 이러한 활동에 앞장섰다.
대한인국민회 부의장으로 활동
선생은 1941년 12월 대한인국민회 총회에 로스엔젤레스 대표로 참석하여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43년 9월 26일 개최된 한족연합회에서는 위원 겸 재무과장에 선임되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43년 9월 이승만이 영도하는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로부터 탈퇴하자, 1944년 연합위원회는 워싱턴에 별도로 외교사무소를 설치하여 동지회의 외교사무소와 병립함으로써 외교활동에 지장이 생겼다. 이에 임시정부는 외교기관의 통일책을 강구하여 1944년 8월 주미외교위원부를 폐지하고 새로이 주미외무위원회를 설치키로 하고 위원회의 인선을 재미한인사회에 일임하였다.
그리하여 미주와 하와이 각지에 있던 17개 단체 중에서 13개 단체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위원부 개조안 발포에 의하여 대표회를 열기로 동의하였다. 1944년 10월 28일 13개 단체 대표들이 로스앤젤레스에 모여 재미한인 각 단체 대표회를 열자 대표원의 자격으로 이에 참가하여 15명의 주미외무위원회 위원을 선출 추천하였는데 선생도 주미외무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동지회가 불참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 인선을 인준하지는 않았다.
선생은 광복 후인 1945년 1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귀국하여 조국재건과 흥사단 부흥에 힘쓰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지원과 흥사단 정신의 발양에 헌신하였다. 그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사회를 위하여 일하다가 1956년 1월 7일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