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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만주의 무장항일 투쟁의 선봉장 '정이형 선생'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정이형(鄭伊衡,1897. 9. 16~1956. 12. 10) 선생은 1897년 9월 16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 화하리(化下里)에서 아버지 정효기(鄭孝基)와 어머니 수원 백씨(水原白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하동(河東)이고, 호는 쌍공(雙空)이며, 본명은 원흠(元欽)이나 이명인 이형(伊衡)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재산이 넉넉하고 학문에도 관심이 많았던 부친의 덕택으로 선생은 어려서부터 독선생(獨先生)을 모시고 한학을 배웠다. 특히 선생에게 한학을 가르쳐준 사람은 김평식(金平植)이었는데 그는 평북 의주 출신으로 후일 만주로 망명하여 대동향약(大東鄕約)을 운영하다가 3.1운동 이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군부(義軍府) 등 복벽주의(復?主義) 독립군 단체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인물이었다.

   
▲ 정이형 선생

따라서 선생은 그로부터 한학과 더불어 복벽적 항일의식을 전수받았다. 하지만 선생은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근대적 민족의식을 수용하였다. 그것은 한말 계몽운동 단체인 서북학회(西北學會) 회원으로 활동하고,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는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제공하였던 선생의 친형 정원익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후 만주로 건너가 1922년 남만 봉천성 관전현(寬甸縣)에 위치한 대한통의부(統義府)에 가담하여 사령관 신팔균(申八均)의 부관으로서 김이대(金履大)·현정경(玄正卿)·강제하(康濟河)·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무장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에 대원을 인솔하고 국내에 진입하여 평북 초산(楚山)부근의 파출소를 습격하고 일경 고교(高橋)등을 사살하였다. 1924년에는 김동삼(金東三)·이상룡(李相龍)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정의부(正義府)에 가담하여 사령관 부관으로서 계속 활동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내각 취임문제로 정의부 등에 내분이 일어나게 되자,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를 소집하고 대책을 협의하게 되었는데 그는 제1중대 대표로 참석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이에 정의부가 강화되자 그는 제6중대 1소대장이 되었다가 7중대장에 임명되었으며, 1925년 3월에는 부하 30여명을 인솔하고 평안북도 지방에 진입하여 일경주재소 5개소를 습격하고 허다한 전리품을 가지고 무사히 귀대하였다.

1926년 3월에는 민족주의 계열의 양기탁(梁起鐸)·현정경(玄正卿)·오동진(吳東振)·곽종대(郭鍾大)와, 천도교 혁신파인 김봉국(金鳳國)·이동구(李東求)·송 헌(宋憲) 그리고 노령에서 온 최소수(崔素水)·이규풍(李奎豊)·주진수(朱鎭秀)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이 조직되자 그는 중앙위원으로서 활약하였다.

같은 해 5월 길림성 북극문(北極門)부근에 근거를 두고 김종범(金鍾範)과 같이 표면상 추전양행지점(秋田洋行支店)을 경영하며 모종의 사명을 추진 중 동지들과 함께 길림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에 중국 관헌은 국권침해라 하여 일본영사관에 강력히 항의하기도 하였으나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그는 지루한 예심 끝에 1928년 4월 2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공적>

ㅇ 1921년 선룡사립보통학교를 설립하고 민족 교육 실시
ㅇ 1922년 대한통의부에서 무장항일투쟁 전개
ㅇ 1925년 정의부 의용군 중대장, 평안북도 일경주재소 5개소 습격
ㅇ 1927년 고려혁명당 중앙위원으로 활약 중 피체
ㅇ 1928년 무기 징역을 받고 옥고 중 광복으로 출옥

<자료: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