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금 흔히 “표구”라고 말하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일본 수입말입니다. 그럼 그 이전엔 뭐라 했을까요? 《세종실록》 세종 27년(1445년) 4월 5일 기록을 보면 “편찬한 시가(詩歌)는 총 1백 25장이온데, 삼가 쓰고 장황(裝潢)하여~"라고 하여 ”장황“이라고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단종실록》 단종 1년(1453년) 7월 4일 기록에는 "일본의 중 도안(道安)이 일본과 유구(琉球) 두 나라의 베낀 지도(地圖) 4벌을 가져왔는데, 장배(粧褙)하여~”라고 하여 “장배”라고도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밖에 여러 기록에는 “장표”, “표배”, “배첩(褙貼)”이라는 말도 쓰였습니다. 그 가운데 간재집(艮齋集)에서는 “안감을 대어 풀을 붙이는 것을 속어에 배첩(褙貼)이라 이른다 하였는데 병풍장, 배첩장(褙貼匠)이라는 다른 기록들과 함께 적어도 조선후기에 배첩이 주로 쓰는 말이었지요.
조선의 글과 그림은 종이ㆍ비단 따위를 붙여 미적 가치를 높임과 동시에 실용성과 보존성을 높여주는 서화처리법을 거쳐 족자ㆍ액자ㆍ병풍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배첩의 제작기법은 액자ㆍ병풍ㆍ족자ㆍ장정 그리고 고서화 처리의 다섯 가지지요. 이 가운데 장정(裝幀/裝訂)은 책의 겉장이나 면지(面紙), 도안, 색채, 싸개 따위의 겉모양을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또 “고서화 처리”는 표지나 속지가 상한 고서 처리를 말하지요.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102호 배첩장은 김표영 선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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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무형문화재 제102호 배첩장(褙貼匠)은 김표영 선생의 작업 모습(문화재청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