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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먼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우리 후손을 위해 풍찬노숙(風餐露宿) 독립 투쟁을 하시다가, 기어히 중국 하얼빈 역에서 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시고 조국 대한민국에 신명을 바치신 의사님 영정앞에 깊은 존경과 사모의 마음을 올립니다.
저는 월간 저널 [영웅] 발행인 박창재입니다.
지난 3월 26일은 의사께서 순국하신지 꼭 10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저는 오늘 이 편지를 의사님께 올리면서,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대한제국 국권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두에서 처단하시고,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시면서 남기신 의사님의 최후의 유묵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에 대하여 그 뜻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기어 보려합니다.
작년, 2015년 여름의 막바지는 한반도 전역을 뒤흔드는 ‘천둥’과 ‘폭우’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온 국민이 숨죽여야 했습니다. 이 천둥과 폭우는 다름 아닌 북측이 설치한 비무장지대 지뢰 폭발로 우리 측 군인 2명이 부상을 입으며 시작된 남북간 긴박했던 대치상황을 말합니다. 다행히 양측 고위급 접촉을 통해 무박 4일 동안 43시간의 밀고 당기기를 거듭한 끝에 한반도의 긴장 국면은 극적으로 해소될 수 있었습니다.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 있었던 그 순간, 북한으로부터 ‘도발 사과’를 이끌어낸 원동력은 우리 국민들의 성숙한 자세와 대응 태도에 있었습니다. 그 중에 무엇보다 전역을 연기하면서까지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치려 했던 50여명의 대한 건아가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에서 주저 없이 목숨을 내걸었던 그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군인 신분이라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이십대 초중반인 그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 도대체 어떠한 소신과 확신이 있었기에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참 용기를 몸으로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 바로 106년 전 의사께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라는 애국 헌신 정신이 우리 국민의 DNA 에 깊이깊이 뿌리하여 이어여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가슴에는 군인으로서 최고의 명예이자 기본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위국헌신(爲國獻身) 군인본분(軍人本分)’ 정신이 살아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글은 의사께서 뤼순감옥에 수감된 후 순국 직전 옥중에서 의사님을 감시하고 관리하던 일본인 간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써주셨던 최후의 휘호이자 유필입니다.
여순 감옥에서 의거 직후 안중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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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거 직후 여순 감옥에서 안중근의사 |
옥중에서 의사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관리하던 일본군 간수 지바 도시치는 의사님의 인품에 깊이 감화되었고, 의사님이 사형 집행을 받게 될 때에 “일본인으로서 당신을 지켜주지 못해 정말 미안합니다.”고 용서를 빌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의사님께서는 지바 도시치에게 사형 집행 당일 아침 자신의 마지막 유묵이 될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을 써 주시면서 “당신은 일본군 군인으로서 당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동양의 평화와 한·일 우호가 이루어지면 그때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라고 답하셨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당신, 잠시 후면 독립의 기쁨도 채 못 보시고 저 세상으로 가셔야할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쩌면 그렇게 의연하셨습니까? 당신의 나라를 짓밟고, 당신의 목숨을 앗아갈 일본국, 원수의 나라 간수에게, ‘군인의 본분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는 것은, 비록 서로 적으로 맞서고 있는 사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 나라를 위해 나의 목숨을 바치지만, 당신 역시 당신 나라의 군인으로서 본분을 다하라는, 적국의 군인까지 품어 안는 의사님은 정말 거인중의 거인이십니다.
의사님의 인간애적인 행동에 감동한 지바 도시치는 1921년 이 유묵을 갖고 고향인 일본 구리하라시로 돌아와 당신의 영정과 유필을 극진히 모셔 기리며 기념비를 세웠고, 이후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유묵과 영정을 모시고 매일 추모했다고 합니다. 그가 죽은 후에는 미망인과 조카 딸(양녀) 미후라가 봉안하다가, 동경 국제한국연구원의 최서면(崔書勉) 원장을 통해 1976년 2월 11일(19080년 8월 23일) 의사님의 숭고한 애국 헌신, 평화사상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사단법인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하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6년 전, 의사님께서 쓰신 이 최후의 유필은 이 같은 역사적 사연을 간직한 채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젊은 군인들의 가슴과 가슴으로 이어져 횃불처럼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의사님의 가르침이 백여 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나라 국민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까지 널리 존경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의사께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투사이기 이전에 동북아 평화공동체를 구상하며 「동양평화론」를 집필한 사상가이자 평화주의자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의사님께서는 미완의 「동양평화론」에서 일본의 대륙침략을 규탄하고, 이러한 침략전쟁으로 말미암아 일본이 패망할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특히 동북아시아에서의 항구적 평화와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한ㆍ중ㆍ일 삼국이 협력체제를 만들어 상호 협력하면 동북아 발전과 세계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설파하셨는데, 이것은 오늘날 유럽공동체(EU)와 같은 것으로 한 세기를 앞서 이 같은 국가 협력체제를 구상하셨던 것입니다.
의사님의 평화사상은 미래 지구촌을 밝히는 평화의 등불입니다.
의사님께서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남기신 「동양평화론」은 평화의 상징으로서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까지 그 빛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뤼순감옥 전시관에 이어 2014년 1월 하얼빈역에 우리나라 박근혜 대통령의 요청으로 중국 시진핑 주석이 의사님을 추모하고 기리는 기념관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일본열도 동북쪽에 위치한 미야기현의 대림사 등 절 2곳에도 의사님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매년 9월초에는 한일 양국의 민간교류단체가 모여 추모제를 열고 있습니다.
또한 2011년에는 열도 남쪽 규수 사가현 주민들이 동양평화비를 세우고 의사님의 평화사상을 흠모하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립의과대에 세워졌다가 2013년 철거됐던 ‘안중근의사기념비’가 2015년 7월 러시아 우수리스크로 이전돼 설치되었습니다.
한반도를 넘어 일본열도와 만주벌판, 그리고 유라시아로 향한 의사님의 위대한 애국, 헌신정신과 평화사상. 그리고 용서, 화합, 인류공영발전을 위한 큰 걸음은 미래 지구촌을 밝히는 평화의 등불이 되어 찬연히 빛나고 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미래의 후손을 위해 언제나 의연하게 적과 맞서 담대히 싸우시고, 죽는 그날까지 동양 평화, 아니 세계 평화를 그리시며 순국하신 의사님의 영전에 다시 한 번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바칩니다.
이제 의사님께서 그렇게 애타게 그리시던 조국 광복을 맞은 지 71년이 되었습니다. 남과 북이 합쳐진 완전한 광복, 조국의 퉁일은 남은 저희들의 몫으로 남겨두시고 이제는 평안히 눈을 감고 후손들을 지켜보아 주십시오.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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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창 재
도서출판 꼬레아우라 대표 겸 월간 저널 [영웅]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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