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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할아버지가 치켜든 ‘통합’과 ‘통일’의 기치를 따라

[백년편지] 독립운동가 김붕준 선생 - 김창희

[우리문화신문 = 전수희 기자] 저는 어려서부터 주위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참 많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집안의 어른들께서 할아버지의 성함을 언급할 때면 늘 크나큰 존경의 마음을 담아 말하곤 했습니다. “대단한 분이시지.” “중국 대륙을 휘젓고 다니면서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분이시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다 그 어른 덕분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한 마디로 할아버지는 직계 후손은 물론이고 저같은 방손(傍孫)을 포함해 우리 친척 모두의 ‘영웅’이었습니다. 특히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가족들이 내세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대부분 입에 풀칠하고 사는 정도에 그쳤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종종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어쩌면 친척들 사이의 유대감을 확인하는 중요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고도 생각됩니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생전에는 나라를 되찾는 일에, 납북돼 돌아가신 뒤에는 친척들을 결속시키는 일에 각각 큰 역할을 하신 셈입니다.

김붕준 선생

이제는 할아버지를 직접 뵌 어른들이 친척들 중에도 많지 않습니다. 삼일운동 직후에 중국으로 망명하셔서 해방된 뒤에야 귀국하셨다가 그나마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납북되시고 말았으니 직접 뵌 분들이 지금 얼마나 생존해 계시겠습니까? 그래서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에 태어난 저희 세대에게도 이미 ‘전설’이 되셨습니다.

제가 할아버지의 활동상을 ‘말’이 아니라 ‘글’로 접한 것은 1970년대에 대학에 들어간 뒤였습니다. 짙은 눈썹과 멋진 카이제르 수염의 할아버지가 지금의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의 의장까지 지내신 걸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단박 의정원 의장이 되신 게 아니라 1919년 4월 임시정부의 수립 단계에서부터 일제강점기 말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궂은일들을 두루 맡아 하신 뒤에 의장이 되셨음을 안 것은 다시 세월이 한참 지난 뒤였습니다.

‘군무부 서기’, ‘상하이교민단 총무’, ‘국무원 비서장’, ‘독립신문 경리’, ‘인성학교 교장’, ‘공평사 조장’, ‘흥사단 재무’ 등등 각종 실무 역할을 참 많이도 하셨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선 한없이 성가신 일들이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접하면서 ‘아, 임시정부 안에서 조직과 사무 관리에 능력을 인정받은 몇 안 되는 분들 중의 한 분이셨던 모양이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머리’가 되려 하지 않고 ‘발’의 역할을 하고자 하셨던 점이 오히려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러다가 임시정부 서류들 중에서 재미있는 문건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제목은 ‘공포 누락 각성의 건’(1933년 7월 22일)이었습니다. 임시의정원은 각종 의결 사항들을 ‘공보’를 통해 공포해 오고 있었는데 한번은 일부 의결사항이 누락됐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그걸 각성하라고 문건으로 촉구한 겁니다. 웬만하면 말로 해도 될 것을 굳이 이렇게 기록으로 남긴 걸 보면서 이번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성격이 꽤나 꼬장꼬장한 분이셨구나!’

흔히 이렇게 말하지요. 조직 또는 재무 계통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보수화’ 경향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해하는 할아버지는 그렇지도 않으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한독당 당원으로서 1932년 완전히 새로운 지역인 광저우로 파견돼 광동지부를 개척하고 그 지부장이 되셨습니다. 중국 측과의 통일전선 구축에 매개 역까지 하셨지요. 그런가 하면 이곳에서 할아버지는 의열단 계열의 청년들과도 ‘동지’ 관계를 유지해 그 뒤 좌우합작과 통일전선 운동의 토대를 마련하신 거지요. 이 대목에서 저는 한 가지를 더 생각했습니다. ‘아, 균형감각도 탁월하셨구나!’

아마 그런 균형감각이 평가를 받으셨던 모양입니다. 임시정부가 가정 어려운 시기에 해당하는 1939년, 할아버지는 임시의정원의 제15대 의장으로 선출되기에 이르렀으니까요.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2년 이상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길 위를 전전하거나 물 위에 떠서 지냈지요. 이것은 수사(修辭)가 아니라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1940년 임시정부는 최종목적지인 충칭(重慶)에 도착하면서 피난살이 중에 유야무야 됐던 무장력을 재정비하고 독립운동의 좌우 양진영을 통합하는 일을 서둘렀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체절명의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세상 일이 어디 불가피하다고 해서 바로 실현되던가요? 좌우 양 진영이 통일전선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복자한 계산을 하는 바람에 통합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일은 좀처럼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1941년 10월 제33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할아버지가 그 엉킨 매듭을 칼로 끊어내듯이 잘라버렸습니다. ‘아, 그 결단력!’ 의장이던 할아버지는 당신의 소속이던 한독당과의 사전 협의 없이 의원 보궐선거를 실시해 민족혁명당 사람들이 임시의정원에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를 혹독했습니다. 한독당 측이 할아버지를 탄핵한 것은 물론이고 할아버지의 주도 아래 실시된 선거를 무효화해 버렸습니다. 이에 질세라 할아버지도 뜻을 같이 하는 당원들을 모아 민족혁명당으로 합류해 버렸지요. 통합과 단결의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이뤄질 일은 이뤄지고 마는 법인가 봅니다. 그 이듬해 좌우합작이 급류를 타면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고, 민족혁명당 등 좌익과 무소속 의원 17명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등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할아버지가 시도했던 일이 꼭 1년 뒤에 그대로 실현된 셈입니다. 그로부터 다시 2년 뒤 할아버지도 다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 되었고, 임시정부는 이 합작의 형태 그대로 마침내 1945년 환국에 이른 겁니다.

그 뒤의 일을 세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좌우합작과 국민통합의 정신이 할아버지 정치활동의 바탕이 되었던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으니까요. 이를 두고 세상에서는 할아버지를 ‘중간파’라고 부르기도 하고, ‘합작파’라고 하기도 합니다.

세상이 갈피를 잡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게 엉킨 요즘 세상에서 다시금 할아버지가 해방 전후 시기에 걸었던 길을 생각하게 됩니다. 문제는 통합의 정신이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느 단계에선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통합은 산술적인 중간으로는 이뤄질 수 없겠지요. 말만으로 합작하자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닐 겁니다.

남한과 북한이, 그리고 남한 내의 각 정파가 통일과 통합을 얘기하면서도 내심은 서로 얽히기를 거부하고 있는 오늘, 유난히 할아버지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가 1930년대 이후 일관되게 걸었던 통합의 길에서 오늘날 요령부득의 정국을 타개할 지혜를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멈춰 섰던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비록 통합과 통일의 길이 멀고 험할지라도 할아버지가 먼저 들고 간 깃발을 놓치지 않아야겠습니다. 할아버지 영전에 뒤늦게나마 감사의 술 한 잔 올립니다.                                                                                  방손  김창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