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새벽에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상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뚜껑 있는 교자를 탔었는데 홍제원(洪濟院)에 이르러 비가 심해지자 숙의(淑儀)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宮人)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는데 임금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
이는 《선조실록》 25년(1592년) 4월 30일 기록으로 선조 일행이 임진왜란을 당해
피난길에 오른 내용입니다. 선조 일행은 궁궐을 나와 벽제관에서 점심을 먹은 모양입니다만 원래 벽제관은 우리나라에 오는 중국 사신의 공용
숙박시설로 쓰기 위해 성종 7년(1476) 11월에 세운 것입니다. 중국 사신들은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예를 갖추어 서울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지요.
벽제관은 중국으로 가는 큰 길에 설치된 첫 관문으로 임금이 중국 사신을 친히 배웅하고 맞이하던 모화관에
버금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곳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이끄는 군대와 왜군과의 벽제관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던 곳으로 현재
고양시 고양동에 있는 벽제관 터는 인조 3년(1625)에 고양군을 옮길 때 세운 객관이었습니다만 한국전쟁으로 그만 불타버리고 지금은 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