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대개 사족(士族)이 서인(庶人)과 다른 점은 종의 소유에 있습니다. 지금 조정의 신하로서 종이 많은 사람이 얼마 없는데, 그나마 하루아침에
도망해 흩어져서 사라져버리면 사족이 그 집안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 《성종실록》 14년(1483) 12월 18일
“우리나라 노비에 관한 법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으니 사대부는 이들에 의존하여 살아왔습니다. 대개 농토는 사람의 목숨이고, 노비는 선비의
수족이니, 그 중요성이 서로 같아서 어느 한쪽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 《세조실록》 14년(1468) 6월 18일
위처럼
조선시대 양반들은 종과 말이 없으면 행세를 하지 못했습니다. 양반이 나들이를 할 때 종과 말이 없으면 남에게 빌려오기라도 해야 했습니다. 조선
후기 이덕무(1741 ∼ 1793)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라서 이를 빌리는 것조차 힘겨워 했지요. 그는 말합니다. “남의 말이나
나귀를 빌린 것은 단지 예닐곱 차례뿐이고, 그 외는 모두 걸어다녔다. 혹시 남의 하인이나 말을 빌리면 그들이 굶주리거나 피곤할 것을 염려하여
마음이 매우 불편해지 차라리 걸어 다니는 것이 편했다." - 《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 6
말이 없으면 소라도 타고 아니면 걸어서
갔지만 노자를 지고 가는 종은 꼭 앞세워야 길을 떠날 수 있었지요. 종은 좋은 벼슬아치의 품위를 유지시켜주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땔나무를
할 종이 없으면 언 방에서 그냥 잠을 잤고, 남에게 곡식을 꾸러 보낼 종이 없으면 그냥 굶주리는 일도 있었지요. 이렇게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있어서 종 소유는 신분의 상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