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9 (목)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우리문화편지

조선시대 종을 거느리지 못한 양반, 나들이도 못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41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대개 사족(士族)이 서인(庶人)과 다른 점은 종의 소유에 있습니다. 지금 조정의 신하로서 종이 많은 사람이 얼마 없는데, 그나마 하루아침에 도망해 흩어져서 사라져버리면 사족이 그 집안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 《성종실록》 14년(1483) 12월 18일 “우리나라 노비에 관한 법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으니 사대부는 이들에 의존하여 살아왔습니다. 대개 농토는 사람의 목숨이고, 노비는 선비의 수족이니, 그 중요성이 서로 같아서 어느 한쪽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 《세조실록》 14년(1468) 6월 18일

위처럼 조선시대 양반들은 종과 말이 없으면 행세를 하지 못했습니다. 양반이 나들이를 할 때 종과 말이 없으면 남에게 빌려오기라도 해야 했습니다. 조선 후기 이덕무(1741 ∼ 1793)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라서 이를 빌리는 것조차 힘겨워 했지요. 그는 말합니다. “남의 말이나 나귀를 빌린 것은 단지 예닐곱 차례뿐이고, 그 외는 모두 걸어다녔다. 혹시 남의 하인이나 말을 빌리면 그들이 굶주리거나 피곤할 것을 염려하여 마음이 매우 불편해지 차라리 걸어 다니는 것이 편했다." - 《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 6




말이 없으면 소라도 타고 아니면 걸어서 갔지만 노자를 지고 가는 종은 꼭 앞세워야 길을 떠날 수 있었지요. 종은 좋은 벼슬아치의 품위를 유지시켜주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땔나무를 할 종이 없으면 언 방에서 그냥 잠을 잤고, 남에게 곡식을 꾸러 보낼 종이 없으면 그냥 굶주리는 일도 있었지요. 이렇게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있어서 종 소유는 신분의 상징이었습니다.